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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재민 Oct 24. 2020

#내것 #09 -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 (손흥민)

오랜만에 돌아간 런던에서 축구선수의 기억을 쥐어짰다

다낭과 호이안을 거쳐 다시 하노이로 들어왔다. 한국에서는 맛볼 수 없는 커피를 실컷 즐기며 카페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출판사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다. 손흥민 측과 협의 중이던 에세이 출간 계획이 확정되었단다. “드디어”라는 혼잣말을 하기가 무섭게 “그런데...”라는 상대의 말이 들렸다. 선수 인터뷰를 위해 지금 당장 런던으로 날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허겁지겁 비행기표를 구매했다. 언제까지 있어야 할지 몰라서 편도로 끊었다. 히드로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대한민국 여권은 강력해서 세계 거의 모든 국가를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다. 그 대신에 체류 기간을 확실히 해야 한다. “언제까지 있나요?”라는 입국심사관의 질문에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면 살짝 곤란하다. 영국에서 출국하는 비행기표가 없는 여행자에겐 미심쩍은 눈빛이 날아들기 마련이다.

옛정을 기억하는지 몰라도 히드로 공항 입국심사대는 의외로 친절했다. 무슨 일을 하러 왔다고, 일이 언제 끝날지 몰라서 아직 돌아갈 비행기표를 끊지 않았다는 설명을 건조하게 늘어놓았다. 심사관은 약간 졸린 눈빛으로 고개만 끄덕이더니 스탬프를 쿵 찍고 여권을 내 앞에 툭 던졌다. 옆 칸에서는 동양인 아주머니가 심사관, 아니 정확히는 심사관의 영어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일행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뒤에서 나와 통역을 하기 시작했다.

공항 청사를 나서는 순간 런던의 냄새가 훅 들어왔다. 도시마다 고유의 냄새가 있다. 도쿄에서는 대나무 냄새가 난다. 방콕에서는 푹 익어 군데군데 시커먼 멍이 들기 시작하는 바나나의 달달한 냄새가 난다. 하노이에선 오토바이 매연과 담배 연기가 섞인 냄새가 코를 찌른다. 파리에서는 커피와 크루아상 냄새가 난다. 런던은 화장실 청소 약품과 풀향기가 섞인 냄새다. 내 주관적 후각은 그렇게 런던을 인지한다. 그나저나 런던에 몇 년 만에 온 건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런던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런던은 낡은 도시였다. 뜨내기에겐 역사와 전통으로 보이지만, 정작 거주민은 일상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여름이 되면 지하철 내부의 기분 나쁜 열기를 식히기 위해서 창문을 열고 다닌다고 하면 믿겠는가? 그런 도시에 갑자기 96층짜리 빌딩이 들어섰다. 펑크족들이 득실댔던 토트넘코트로드역 주변은 깨끗이 재개발되어 있다. 생각해보니 한인 슈퍼와 식당이 있던 작은 건물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영표를 취재하느라 자주 찾았던 화이트 하트 레인이 있던 자리에는 초현대식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이 섹시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솔직히 근사함보다는 서운함이 먼저 밀려들었다. 14년 전의 추억이 사라진 기분. 화이트 하트 레인의 소중한 자산이었던 ‘빌 니콜슨 웨이’도, 아치발드 리치의 손길이 닿았던 동쪽 외벽도 이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근사한 메가스토어 전면 통유리에는 손흥민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런던에 도착한 지 며칠 만에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의 개장 경기가 열렸다. 고맙게도 선수 가족의 초대를 받아 박스석에서 경기를 관전했다. 박스석 테라스에서 경기장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뭔가 비현실적이었다. 관중석이 너무나 거대한 동시에 깨끗했다. 항상 잔디가 죽어있던 코너플래그 주변까지 완벽하게 녹색 잔디로 채워져 있었다. 멀리서 몸을 푸는 손흥민이 보였다. 갑자기 우박이 쏟아졌다. 선수 어머니께서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박을 바라봤다. 킥오프 10분 전에 우박은 거짓말처럼 그쳤다.

런던에 머물면서 일하는 동안 손흥민은 펄펄 날았다. 새 경기장에서 역사적 첫 골을 넣었다. 챔피언스리그 8강 맨시티전에서는 혼자 세 골을 넣어 팀을 4강에 올렸다. 손흥민은 매일 3시간씩 근육 마사지를 받으며 빽빽한 경기 일정을 버텼다. 중간에 틈을 내어 TvN 다큐멘터리를 촬영했고, 나의 질문에 기억을 쥐어짜며 대답을 했다. 오전이면 구단 훈련을 모두 마치는데 그 외 시간에도 손흥민은 빡빡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런던 출장의 막바지에 다시 경기에 초대를 받았다. 가족 박스석 한쪽 벽에 사진이 새로 걸려 있었다. 팰리스전 첫 골을 넣고 셀러브레이션을 하는 손흥민의 모습이었다. 클럽 쪽에서 정성스럽게 만들어 가족에게 선물한 것이다. 프리미어리그 클럽은 보유한 스타 선수와 가족을 경기장 안팎에서 극진히 모신다. 경쟁 클럽의 러브콜로부터 스타플레이어를 지키려면 평소에 이렇게 환심을 사야 하기 때문이다.


약 한 달간의 런던 출장에서 한국으로 복귀했다. 포항 친구의 빈 집을 빌려 작업실로 삼았다. 토트넘은 거짓말처럼 챔피언스리그 결승전까지 올라갔다. 그만큼 시즌 종료와 손흥민의 귀국이 늦어졌다. 출판사가 그토록 바랐던 표지 촬영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두 달 정도 지나 출판사 대표가 카톡으로 표지 최종안을 보내왔다. 본인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당시로서는 최선인 것도 사실이었다. 텍스트를 정리하고, 사진을 배열하고, 표지가 정해지면서 책이 조금씩 제 모습을 갖춰갔다. 판권 페이지에 내 이름이 아주 작게 들어갔다.

책이 나온 지 두 달여가 지나 손흥민이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경기에 소집되어 잠시 귀국했다. 출판사가 홍보용으로 사용할 친필 사인본을 요청해서 내가 책 몇 권을 들고 파주로 갔다. 오랜만에 본 손흥민과 잠깐 수다를 떨며 들고 간 책들에 사인을 받았다. 책들은 쇼핑백에 담겨 그대로 출판사에 전달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손흥민과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 런던에서 선수 부친이 수고했다며 챙겨준 친필 사인 유니폼도 아내를 거쳐 누군가에게 선물로 넘어갔다. 그런데 요즘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정도는 있어도 괜찮겠다 싶다. 다음에 만나면 얘기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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