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했다. 정확히 말하면, ‘퇴임’이다. 내가 대표이사로 있던 회사에서 나왔으니까. 자의도 있었고, 타의도 있었다. 어쨌든 마음이 아팠다. 회사를 만든 지 2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휴일에도 사무실에 나갔다. 작은 회사라서 더 그랬다. 내 자리에 앉아있으면 뭔가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불안감이 줄었다. 1사 1루, 번트 작전처럼.
그러다가 회사의 모든 곳에서 내가 지워졌다. 사업자등록증, 법인등기부등본, 회사 정관, 홈페이지, 잡지 크레딧에서 내가 사라졌다. 이런 일은 스티브 잡스쯤 되어야 겪는 것 아닌가. 내가 뭐라고 내가 만든 회사를 떠나는, 당황스러운 상황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지 영문을 몰랐다. 새로 생긴 것이라곤 ‘전(前)’이란 한 글자뿐이었다. ‘전 편집장.’ former. 이렇게 쓸쓸한 단어였던가?
몇 주 동안 술만 마셨다. 사흘 마시고, 하루 죽었다. 또 사흘 마시고, 하루 죽고. 술이 아니라 함께 잔을 기울일 누군가가 필요했다. 백수가 되기로 한 결정에 자의도 섞였으므로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처지를 한탄하지도 않았다. ‘누군가’들은 제 역할에 충실했다. 잘될 거라고, 때려치울 수 있어서 부럽다고, 함께 무언가를 해보자고 했다. 모두 내겐 큰 응원이었다. 뜨거운 박수였고, 감사한 격려였다.
한국을 떠나야 했다. 서울에 있으면 뭔가 할 것도 없고, 할 필요도 없는데, 불안감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이제 좀 쉬어도 된다’는 주위의 격려도 효험이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루저가 되는 기분이었다. 내 회사를 꾸릴 때, 나를 옥죄었던 그 기분이 도대체 가시지 않는다. 외국으로 나가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조금 더 뻔뻔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가가 오를 대로 오른 방콕은 이제 백수의 낭만을 허락하지 않는다. TV에서 박나래가 하노이에서 천상의 가성비를 즐기고 있더라. 유튜브에서 백종원 씨의 프로그램도 찾아봤다. 신이 점지해준 것도 아닐 텐데 하노이에서 2018 AFF챔피언십(스즈키컵)이 열릴 예정이었다. ‘박항서 매직’이 본격적으로 시험 무대에 오르는 대회다. 생계 탓에 당장 축구 기자를 버리지 못하는 처지를 신이 애써 배려하는가 보다. 하노이로 가기로 했다.
축구만 있는 글에 신물이 나서 오래 알고 지낸 출판사 대표에게 연락했다. “하노이 책을 쓰겠다”라고 우겼다. 대표는 순순히 응했다. 퇴사 선물 셈 치는 것 같았다. 서점에 갔더니 베트남 여행 책은 별로 없었다. 스즈키컵을 취재해서 어딘가에 글을 팔고, 남는 시간에 여행책을 쓰겠다는 작전을 세웠다. 하노이에 가면, 님도 보고, 뽕도 딸 수 있을 것 같았다.
출국일이 다가오면서 여행책에 관한 마음을 고쳐먹었다. 가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곳에 관해 무언가를 쓰겠노라고 장담했다니. 무책임한 선언이었다. 퇴사자의 객기가 이런 건가 싶었다. 궁둥이 잠깐 붙이고는 “하노이 최고의 커피”라는 설레발 블로거가 될 것 같았다. 대표에게 “일단 가서 좀 보겠다”라고 고백했다. 가서 직접 보고 듣고 찍고 하면서 무엇을 쓸지를 고민해 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시간이 많았다. 아주 많았다. 천천히 걸어도 되고, 한 번 갔다가 두 번 가볼 수 있다. 단기 여행자에겐 없는 내일, 모레, 글피, 다음 주가 있었다. 내키면 다음 달도, 미치면 다음 해까지 있었다. 콩카페의 코코넛스무디 외에 뜨거운 차, 과일 주스, 베트남 커피도 마셔보고 싶었다. 오늘 마시고, 내일 가고, 모레 들르고. 그런 다음에야 이러쿵저러쿵하기로 했다.
저녁 늦은 시간, 한국의 알록달록한 아웃도어 패션 부대에 포위당한 채로 5시간 반을 날았다. 여행 기분에 한껏 들떴던 50~60대 중년 관광객들은 기내 조명이 어두워지자 거짓말처럼 전원 숙면에 들어갔다. 그리고 착륙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원기를 회복하셨다. 자정을 조금 넘겨 하노이 노이바이국제공항에 떨어졌다. 대한민국 아웃도어 패셔니스타들께서는 능숙한 가이드의 인솔로 어디론가 재빨리 사라졌다. 출구 앞 휑한 공간에 갑자기 나 혼자 남은 기분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하노이에 왔다. 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