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가 어려운데 걸어보면 걸을 만하다
내가 하는 운동이 있다. 걷기다. 살면서 달리기, 윗몸일으키기, 플랭크, 턱걸이를 시도했다가 모두 포기했다. 결론은 걷기였다. 사지 멀쩡하면 걷는 게 정상이니까. 무슨 광고에서 ‘걷기만 해도 건강해진다’라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괜히 칭찬받는 기분이었다. 따로 부탁한 적도 없는데 아이폰은 내 걸음 수를 꼼꼼히 센다.
해외여행은 걷기로 가득하다. 건강에 좋은 만큼 걷기는 동네 구경에도 좋다. 맛집을 찾으려면, 고소한 카페를 찾으려면 걸어야 한다. 24시간 편의점을 찾아 주변을 헤맨다. 구글맵이 있어도 누구나 초행길에서는 조금씩 헤맨다. 편의점처럼 생긴 빈마트(VinMart)에 밤늦게 갔더니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서클K까지 걸었다. 딱히 살 것도 없는데 괜히 가서 음료수 하나 사서 나온다. 한국인은 역시 편의점에서 평안을 얻는다.
걸으면 많은 것이 보인다. 내기 장기에 열중인 아저씨 무리, 곳곳에 진을 친 길거리 식당, 돼지고기 국물을 우리는 대형 솥, 목욕탕 의자에 앉아있는 오토바이 발레 직원들, 플라스틱 공을 차며 노는 남자 꼬맹이, 레이저포인터로 개와 노는 여자 꼬맹이, 쭈그려 앉아 채소를 다듬는 아줌마, 공안이란 어감이 무안하게 동료와 수다를 떨며 활짝 웃는 공안…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하노이 인도에서 똑바로 걷기가 어렵다. 인도의 주인이 보행자가 아니다. 이곳에는 주인이 정말 많다. 대부분 건물 앞 인도는 오토바이 주차장으로 쓰인다. 너무 뻔뻔하지만 보행 방해를 탓하기가 머쓱해질 정도로 질서가 정연하다. 남은 공간은 길거리 식당과 카페가 차지한다. 열대의 거대한 가로수가 좁은 인도 전체를 가로막기도 한다. 신시가지의 인도는 사정이 낫다. 그런데 그곳에는 구경거리가 없다. 세상은 공평하다.
이리저리 피하다 보면 결국 나는 차도로 내려가 갓길을 걷는다. 그게 유일한 직진 보행 방법이다. 차도로 침범한 보행자를 향해 자동차와 오토바이들이 경적을 울려댄다. 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인도에서 쫓겨난 것도 서러운데 다들 너무한다. 내가 유일한 갓길 보행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위안을 준다. 신짜오(안녕하세요), 저는 방금 인도에서 쫓겨난 한국인 여행자입니다. 인도에 자리가 생기면 금방 돌아갈게요. 감사합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군사훈련소에서 중대장이 했던 말이다. 혹한에 덜덜 떨고 있는 훈련병들 앞에서 할 소리인가 싶었다. 엄동설한을 어떻게 즐기란 말인가. 살면서 남에게 절대 해본 적 없는 소리다. 하노이 초행자들에겐 해야 할 것 같다. 직선보다 곡선을 즐겨라.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맛이 꽤 짭짤하다. 돌아가면서 길거리 음식 메뉴도 관찰하고, 잠시 차도로 대피했다가 무단횡단하는 요령도 습득하자. 불편하다고 투덜거리기에 귀국일은 너무 빨리 다가온다.
천천히 걷기도 좋다. 우리는 너무 빨리 걷는다. 몇 년 전, 방콕에서 내 걸음 속도가 페라리 수준이라고 처음 깨달았다. 걷는데 자꾸 앞사람이 내 길을 방해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 혼자 너무 빨리 걷고 있었다. 과속운전 차량은 쉬지 않고 차선을 바꿔야 한다. 내가 그러고 있었다. 동남아의 보행 속도에 맞춰서 걷기로 했다.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천천히 걸으려고 애쓴다. 속도를 줄이면 서울의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깨달을 수 있다. 지하철 환승 통로에서는 아예 스프린트 수준이다. 다음 차가 3분 뒤에 오는데.
하노이에서도 천천히 걸으면 좋다. 직진하지 못한다고 짜증 내지 마라. 느리게 돌아가면 된다. 잠시 멈췄다가 다시 걸음을 떼면 된다.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어서 걷는 것 아닌가. 걸으면서 호안끼엠 호수의 잔잔한 물결도 구경하자. 세상 둘도 없을 만큼 귀여운 개들과 눈도 마주쳐보고. 연탄 불에 달달 끓는 주전자도 구경하자. 우리 그런 것 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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