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우습게 보다 큰코다친다

자나 깨나 불조심이 아니라 맞춤법과 오타 조심

by 류재민

기자들은 항상 출입처로부터 보도자료를 받습니다. 기관이든 단체든 홍보부서가 있는 곳에선 매일같이 보도자료를 작성해 배포합니다. 보도자료만 전담하는 직원이 별도로 있을 정도입니다. 그들이 보내는 자료는 ‘반(半) 기사’라고 보면 됩니다. (반건조 오징어도 아니고.)


왜냐하면 출입처에서 보내오는 자료를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보도하는 기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기사의 틀에 맞춰 손보지 않을 정도로 작성해서 보내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보내온 자료에 기자 이름만 입력해서 보도하는 행태를 서슴지 않고 있다는 사실, 여러분은 알고 계시나요? 다 된 밥에 숟가락 올리거나,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지요. 그렇게 따지면 기자는 참 편한 직업입니다. 물론, 이 땅의 기자들이 전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일부 몰지각한 기자들에 국한한 얘기입니다.


하지만 기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보도자료를 쉽게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솔직히 저도 그렇거든요. 직접 취재하고 작성한 글이 아니면 기사 가치(밸류)나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그렇다고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큰코다칩니다.


몇 년 전 한 대학에서 보낸 보도자료 샘플입니다. 기자들은 출입처에서 보내오는 이런 형태의 보도자료를 받아 기사를 작성합니다.

출입처 보도자료에 오타가 있다거나 맞춤법이 틀린 부분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보도할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독자들은 ‘맞춤법도 모르는 기자’ ‘오타 점검도 하지 않는 언론사’라고 욕하기 십상입니다. (눈앞에는 안 보이니 맘속으로 마구마구 할 겁니다.)


기자 입장에선 억울하겠죠.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직접 취재해서 보도한 기사나 출입처 보도자료를 보고 쓴 기사나 독자의 눈에는 모두 ‘기자가 쓴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기획(발굴) 기사와 보도자료를 구분해서 보는 독자는 얼마 없습니다. 아니, 1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요. 보도자료 하나라도 허투루 쓰면 안 됩니다. 기자야 그렇다 치고, 소속 언론사에 대한 신뢰마저 하락하는 순간이니까요. 사건 사고는 긴장이 풀렸을 때 가장 많이 발생합니다. 투수도 상위타선을 잘 막아놓고 하위 타선에서 홈런을 맞을 때가 많습니다.


상위타선은 잘못 던지면 실점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잔뜩 긴장합니다. 그렇다 보니 공 하나하나 신중에 신중을 기해 던지는데요. 큰 산을 넘었다고 생각한 순간 예상치 못한 곳에서 큰 것 한 방을 맞는 것이죠. 프로의 세계에서는 ‘1할 타자’도 담장을 넘길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신문과 방송을 보는 요즘 독자와 시청자 모두 ‘프로’입니다. 댓글과 방송사 게시판을 통해 비판과 지적을 담은 냉정한 평가를 보냅니다.


기사 하나라도 쉽게 생각하고 썼다가는 자존심에 스크래치는 둘째 치고, 시말서 쓸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알거나 보면, 얼마나 얼굴 화끈거릴 일입니까. 숨고 싶을 만큼 X 팔리고 부끄러울 일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맞춤법 책 사서 보고, 외래어 표기 사전보고 공부해야 합니다. 기사 다 쓰고 나서는 몇 번이고 확인해야 합니다.


숫자 1000에서 ‘0’ 하나를 더하거나 빼진 않았는지, 피의자와 피해자를 바꿔 쓰진 않았는지, 사흘(3일)을 ‘4흘’로 쓰진 않았는지, 아이를 ‘낳다’를 ‘낮다’나 ‘낫다’나 ‘났다’나 ‘나았다’라고 쓰진 않았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은 윤동주 시인의 시 한 편 소개합니다.

쉽게 쓰여진 시(詩)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疊房(육첩방)은 남의 나라,

詩人(시인)이란 슬픈 天命(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詩(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學費封套(학비봉투)를 받아

大學(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敎授(교수)의 講義(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沈澱(침전)하는 것일까?

人生(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詩(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六疊房(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時代(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最後(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慰安(위안)으로 잡는 最初(최초)의 握手(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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