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짓것 지면 좀 어때, 괜찮아!

최선을 다해 경쟁하고, 졌을 땐 진심 어린 박수를

by 류재민

얼마 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가 KT 위즈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구단 창단 첫 우승이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스포트라이트는 준우승한 두산 베어스에 쏠렸습니다.


KT 위즈 우승을 축하하는 신문광고를 했기 때문입니다. 두산이라고 하면, OB 베어스 시절부터 야구 명가인데요. 한국시리즈에서 4전 전패를 당하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 팀 첫 우승을 축하하는 광고를 실었으니 얼마나 배포가 큽니까. 실로 야구 명가의 ‘품격’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듯 경쟁에는 최선을 다하고, 졌을 땐 깨끗하게 승복하는 것이 ‘페어플레이’ 정신 아닐까요? ‘행복한 2등’을 응원한 팬들은 어쩌면 내년 시즌 더 많은 박수를 보낼지 모릅니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준우승 팀인 두산 베어스가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한 KT 위즈에 축하 광고를 실어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출처:두산 베어스 페이스북.

초등학교 4학년 딸이 며칠 전부터 공기놀이를 열심히 하더군요. 웬일로 공기를 다 갖고 노나 싶었죠. 얘기를 들어보니 학교 수업(요즘은 ‘창의체험 활동’이라는 수업이 있다고 합니다)으로 공기 시합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알록달록 공깃돌을 갖고 열심히 손을 놀리는 딸을 보면서 제 어릴 적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시골에서 자라 딱히 갖고 놀만한 게 없던 시절, 땅에 뒹구는 작은 돌멩이는 동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최고의 놀잇감이었습니다. 그때 했던 놀이를 수십 년이 흘러 제 딸이 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징어 게임’도 있네요.)


문제는 딸이 ‘창체 활동’ 시간에 하는 공기는 ‘놀이’가 아닌 ‘시합’이라는 데 있습니다. 둘이서 한 조를 이뤄서 이긴 사람이 다음 단계에 올라가는 ‘토너먼트’ 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딸의 상대가 아주 강력한 ‘우승 후보’라고 하네요.


연습을 하면서도 기운이 없어 보이는 딸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습니다. “까짓것 지면 좀 어때, 괜찮아.” 그러자 딸이 대꾸합니다. “걘 정말 엄청 잘한단 말이야. 난 이기고 싶은데..” 딸이 승부욕이 많다는 걸 알기에 쿨한 척 넘어가려고 했는데, 제 말에 못내 서운했나 봅니다.
그래서 몇 마디 더했습니다. “네가 이길 수도 있어.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방심하면 지는 거야. 네가 지금처럼 열심히 연습하고 집중하면 못 이길 이유가 없지. 그게 승부의 세계란다. 그래도 지면 어쩔 수 없는 거야. 넌 최선을 다했으니까.”


딸은 그제야 기분이 누그러졌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맞아, 걔도 날 우습게 봤다가 공깃돌 떨어뜨릴 수 있지.” 바로 오늘이 결전의 날이었습니다. 출근 전, 딸에게 “파이팅”을 외치고 나왔지만, 결과가 어땠나 궁금해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지면 좀 어떻습니까. 그때, 그 순간을 신나게 즐기면 되죠.
집에 들어오자마자 딸에게 물었습니다. “공기 어떻게 됐어?” “응, 졌어. 그래도 괜찮아, 그 친구는 2차전에서 다른 애한테 졌거든. 강력한 우승 후보가 꺾인 거야. 우승 후보를 이긴 친구는 최종전까지 갔는데, 결승전에서 선생님한테 10점 차로 졌어. 최종 우승은 선생님이었어.”
“푸하하하. 그래, 수고했다. 넌 네가 잘하는 걸 잘하면 돼. 아마 칼림바는 네가 반에서 제일 잘할 거야”라고 달랬습니다. “12월 24일 장기자랑이 있대. 크리스마스 노래를 칼림바로 연주해서 1등 할 거야.” 딸의 씩씩함에 마냥 흐뭇해졌습니다.

누구에게나 잘 하나는 건 하나씩 있는 법입니다. 미련하다고 애먼 욕을 먹는 곰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고 하잖아요. 지면 좀 어떻습니까. 그때, 그 순간을 신나게 즐기면 되죠. 지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면 되고요. 내년 대선을 앞두고 아등바등 싸우는 정치권에도 이 말이 가닿기를 바랍니다. 물론 귀담아듣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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