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도깨비(28화)

#28. 봄이 온 무왕산

by 류재민

동장군이 서서히 물러갔다. 꽁꽁 얼었던 촌평리 개울물이 녹았다. 개울가 휘휘 늘어뜨린 수양버들 가지에 꽃눈이 부풀어 올랐다. 산에 들에 개나리와 진달래, 철쭉 따위 봄꽃이 앞다퉈 꽃망울을 터트렸다.


나는 3월 첫째 주 목요일 ‘신 서동요’를 탈고한 뒤 출판사에 투고했다. 몇 군데에서 연락이 올진 몰랐지만, 몇 달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 기분이었다. 집필하는 동안에는 언제 끝날지 막막하고 고통스러웠지만, 막상 탈고하고 보니 뭔가 허전한 기분이 느껴졌다. 시원섭섭한 마음이라고 할까. 무튼, 고생한 작품이 세상에 빛을 보기를 소망하며 본업인 기사 쓰기에 집중할 작정이었다.


봄이 온 무왕산에는 마꽃도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이제 마를 캐 즙을 낸 뒤 도깨비가 타고 떠날 비행접시 연료통에 넣기만 하면 끝날 일이다. 아이들은 개학에 맞춰 집으로 돌아갔다. 미리는 집으로 돌아가며 나에게 이렇게 신신당부했다.


“아빠, 마를 캐러 가는 건 우리랑 같이 가야 해. 곧 봄방학이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나는 ‘그러마’ 약속하고 봄방학까지 기다렸다. 개학한 지 일주일 뒤 봄방학이 이어졌다. 나와 미리, 바리, 도깨비는 휴일 낮 오두막에서 출발했다. 손에는 낫과 호미, 삽을 들었다. 산속은 아직 땅이 덜 녹아 딱딱했지만, 낮게 뿌리내린 마를 캐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반나절 만에 각자 들고 간 바구니에 마 뿌리가 한가득 담겼다. 아이들과 내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도깨비는 힘든 기색을 하는 아이들에게 잠시 쉬었다 하자고 제안했다. 자기 때문에 나와 아이들이 괜한 고생을 한다 싶었는지 한쪽에 미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얼른 평평한 곳에 돗자리를 폈다. 그리고 아침에 미호가 싸준 도시락을 꺼냈다. 아이들은 엄마가 새벽부터 싼 김밥을 숨도 쉬지 않고 먹었다. 음료수와 함께 가져간 단팥빵도 금세 없어졌다. 다들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다.


물만 마시고 앉아 있는 도깨비에게 김밥 하나를 집어줬다. 도깨비는 “별로 생각이 없다”라며 사양했다. 카트 휠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만감이 교차하는 듯싶었다.


“도깨비, 기분이 어때?”

“기분?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어. 우리 별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 좋다가도, 이무기 자네나 아이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면 서운하기도 해.”

“그렇겠지. 몇 달 안 됐어도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을 테니까.”

“미운 정은 없어. 고운 정만 있지. 흐흐.”


그제야 도깨비 얼굴이 밝아졌다. 도깨비가 아이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카트휠로 돌아가서 미리와 바리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하지?”


바리는 “비행접시 타고 놀러 오면 되지. 우리 집이 어딘 줄 다 아는데”라고 했다. 그러자 미리는 “그러다 또 불시착하면 어떻게 하려구?”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통에 모두가 깔깔대고 웃었다.


우리는 도시락을 먹고 나서 포대 자루에 얼마만큼의 마를 더 캤다. 연료통에 넣을 만큼의 양을 캐고 나서 다 같이 산에서 내려왔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려고 했다.


하산 길에 붉은 노을을 바라보던 도깨비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여기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떠날 때가 왔구나.” 도깨비가 혼잣말하는 사이 나는 양쪽에 하나씩 잡고 있던 미리와 바리의 손을 꽉 쥐었다. “조심해. 아직 땅이 미끄러워서 넘어질 수 있어.”


오두막에 도착한 아이들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도깨비는 캐 온 바구니에서 마의 줄기를 꺼냈다. 나와 도깨비는 칼과 가위로 줄기를 잘라내고, 뿌리만 한쪽에 분류했다.


뿌리만 한데 모아서 깨끗이 씻은 다음, 분쇄기에 넣고 즙을 낼 참이었다. 즙을 낸 뒤에는 체에 건더기를 거르고 원액만 연료통에 넣기로 했다. 도깨비는 주술을 부려 분쇄기를 만들었고, 체 받침 작업은 내가 맡았다. 마 뿌리가 갈리며 나오는 즙에서 알싸한 냄새가 풍겼다. 도깨비의 모든 신경은 분쇄기에 쏠렸다.

매거진의 이전글안녕, 도깨비(2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