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고 어색한 것의 변함을 기다리며

삼청동, 거리에서

by 류재민

11월에 부는 바람은 싸늘함을 넘어 추위를 느끼게 합니다. 점심시간 춘추관을 나와 북촌 방향으로 걷습니다. 저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북촌의 골목길을 찾는데요. 사색하기 좋은 장소입니다.


한때는 이 골목에 들어서면 길 어귀부터 한복 입은 관광객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한복 대여점도 여러 곳이었습니다. 코로나와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진 그랬습니다.


가던 걸음이 길 모퉁이 단골 커피숍 앞에서 멈춥니다. 커피숍은 매일 정오에 문을 열었고, 월요일은 쉽니다. 지금은 커피숍 주인이 바뀌었는데요. 전 주인은 이곳을 북 카페로 운영했습니다.

단골 커피숍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입니다.
24058712_1710714745625515_85820678923716089_n.jpg 가게 주인이 바뀌던 날 공짜 커피와 신경숙 소설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켜놓고 책을 고를 때 가졌던 설렘. 그 설렘이 제 발길을 항상 이리로 끌어당겼습니다. 저는 거기서 신경숙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읽었습니다.


1980년대 청춘을 보낸 네 남녀의 이야기를 담은 후일담(後日譚) 문학인데요. 지금과는 다른 성격의 막막함과 갑갑함에 포위됐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들를 때마다 열댓 장씩 읽은 걸로 기억합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올 땐 책갈피를 꽂아두었다 다음번에 그 부분부터 이어봤습니다.


여러분은 각기 크리스토프들이네. 강 저편으로 아이를 실어 나르는 자들이기도 하지. 거대하게 불어난 강물 속에 들어가 있는 운명을 지닌 자들이란 말이네. 강물이 불어났다고 해서 강 저편으로 아이를 실어 나르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되네. 강을 가장 잘 건너는 법은 무엇이겠는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그렇게 반년이 지났을 때,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 날은 정기휴일도 아닌데 ‘CLOSED’ 팻말이 걸렸더라고요. 문 밖에서 안쪽을 향해 고개를 두리번거렸습니다. ‘철컥’하고 안에서 문이 열렸고, 주인은 제 쪽으로 얼굴을 내밀더니 들어오라고 손짓했습니다.

“가게를 내놓아서 정리 중이에요. 커피는 그냥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책장에서 제가 몇 장씩 읽고 꽂아두길 반복했던 책을 빼주었습니다. “단골이었는데, 선물로 드릴게요. 가져다 보세요.” 주인은 나머지 책들은 바자회를 열어 한 권에 천 원씩 팔겠다고 했습니다. 어쩔 줄 몰라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당부했습니다. “주인이 바뀌더라도 자주 찾아주세요.”
춘추관을 따라 올라가는 경복궁 돌담길입니다.

삼청동 골목골목을 걷다 보면 ‘임대’라고 써붙인 상점이 부쩍 늘었습니다. 손님은 없고, 임대료는 감당하기 어렵다 보니 상인들은 하나 둘 문을 닫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그림자가 드리운 길은 황폐하고 삭막합니다. 코로나에 외국인 입국이 어려워지면서 한복 입은 외국인을 만나기도 어렵습니다. 여행객과 이방인의 발길이 끊긴 거리는 헛헛하고 황량합니다.


삼청동 파출소 앞 골목길. 제 사색로 입구입니다.

1년 전 단풍이 고왔던 삼청동 파출소 앞. 올해도 어김없이 단풍이 물들었다 부는 바람에 떨어집니다. 단풍나무는 해가 지나도 그 자리에서 자기 색을 냅니다. 그런데 세상은 1년 만에 몰라보게 변했네요.


정독도서관을 지나고, 현대미술관을 지나고, 경복궁 돌담길을 끼고 다시 춘추관으로 올라오는 길은 사색의 마지막 코스입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인도 위에는 마스크 쓴 눈만 보입니다. 스산한 바람이 골목을 끼고돕니다. 이 거리는 언제쯤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주는 것이네. 함께 아이를 강 저편으로 실어 나르게. 뿐인가. 강을 건너는 사람과 강을 건너게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네. 여러분은 불어난 강물을 삿대로 짚고 강을 건네주는 크리스토프이기만 한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 전체이며 창조자들이기도 해. 때로는 크리스토프였다가 때로는 아이이기도 하며 서로가 서로를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실어 나르는 존재들이네. 그러니 스스로를 귀하고 소중히 여기게.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오늘은 김광석이 부르는 <거리에서>입니다.


영상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TEKkvPQlO9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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