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재민 May 26. 2023

삼각지, 녹사평, 이태원

에피소드 36.

삼각지 로타리를 헤매 도는 이 발길

떠나 버린 그 사랑을 그리워하며

눈물 젖어 불러 보는 외로운 사나이가

남몰래 찾아왔다 돌아가는 삼각지 *     


나는 음치에 박치다. 노래방을 가면 노래보다 술 마시는 걸 즐기는 이유다. 술이 좀 들어가 얼큰히 취해야 노래 부를 용기가 생긴다. 음정 박자 무시한 채 빽빽 소리 지르고 나면 속이 다 후련해진다. 같이 있는 사람들이야 꽤 불편하겠지만. 노래는 못 불러도, 듣는 건 좋아한다. 나이가 마흔 중반이니, 아이돌 노래는 끌리지 않는다. 솔직히,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도 못하겠다. 대신, 뽕짝이나 ‘추억의 7080’ 노래가 나오면 자동반사적으로 흥얼거린다.      


삼각지 11번 출구와 12번 출구. 그 중간에 내가 즐겨 찾는 커피숍이 있다. 점심을 먹고 용산 전쟁기념관 둘레길을 걷다 보면 기자실로 돌아가는 길목의 그곳. 하루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안치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의 노래가 좋다. 듣고 있으면 위로받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인생의 고독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삶이 버거워 주저앉고 싶을 때, 그의 노래를 들어보라. 안도감이 들 것이다. 그는 노래에서 인생이 술 한잔 사 주지 않았다고 투덜거렸다. 자신은 빈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건만.      


인생이, 삶이라는 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노래로 전하고 싶었으리라. 더불어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그렇게 살고 있으니, 인생을 너무 비관하지 말라고 응원하고 싶었나 보다.      


이 노래 작사가는 시인 정호승이다. 어쩐지 가사가 ‘시적(詩的’이다 했다. 안치환은 정호승 시인의 시를 여러 번 노랫말로 삼았다. <고래를 위하여>, <수선화에게>, <풍경 달다> 같은. 안치환은 그의 시로 만든 노래를 한데 묶어 ‘정호승을 노래하다’를 발매하기도 했다.     


시인은 안치환 노래에 “눈물 젖은 손수건이 한 장씩 다 들어 있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나의 시는 그의 노래를 통해 떠났다. 이제 나의 시는 그의 노래”라고 말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은유인가.      


문득, 시를 써보고 싶다는 욕구가 솟아올랐다. 나는 노래를 못부르니, 정호승처럼 멋들어진 시를 쓰면 안치환 같은 가수가 대신 불러줄 테니. 그러다가 이내 마음을 접는다. 그건 이 땅의 시인들을 욕하는 것이기에. 나는 시인이 되기에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란 걸 알기에. ‘눈물 젖은 손수건’이 들어 있을 만큼 글을 쓰려면 좀 더 인생에게 술을 사줘야 할 것 같기에.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서라도.      


나에게 일어난 일은 시차를 두고 누군가에게도 반드시 일어난다고 했던가. 정말로 그렇다면 자기 아픔을 드러내는 일은 그 누군가에게 내 품을 미리 내어주는 일이 된다.**     

*     

커피를 마시고 나왔을 때, 전철역과 교차로 사이에 설치된 바닥 분수에서 쏴, 하는 소리와 함께 물줄기가 올라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랐다. 교차로에서는 앰뷸런스 한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저 차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응급환자를 태우러 가는 길일까, 환자를 태우고 병원으로 향하는 길일까. 길 위에서 길의 방향을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가 삼각지 다음 역인 녹사평이 떠올랐다. 몇 달 전 이태원 참사 분향소가 차려졌던 곳. 나는 그때 분향소에 갔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앰뷸런스에 타보지도 못하고 길 위에서 생을 마감했던 젊은이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그해 10월의 마지막 날, 나는 참사 이후 현장 취재를 위해 이태원에 갔었다. 역 출구 앞에는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공간이 만들어졌다. 추모객들은 줄 서 차례를 기다렸고, 그 옆으로 취재진이 죽 늘어서 있었다. 추모 공간에는 국화꽃과 소주병이 놓여 있었다. 군데군데 추모글을 적은 메모지도 보였다.      


한 노부부가 추모를 마친 뒤 취재진 앞에 섰다. “젊은이들이 너무나 억울하게 당했다”라고 했다. “영혼을 달래주러 왔다.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국가와 나이 든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추모 공간에서 얼마 안 되는 곳. 뉴스에 나왔던 ‘골목길’이 보였다. 폴리스라인이 둘러쳐 있었고, 경찰들이 일반인들 진입을 막았다. 기자 신분증을 내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치과와 호텔 건물 사이, 3~4미터 폭에 성인 대여섯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골목길은 비좁았다. 길 위쪽으로 경사가 지어졌는데, 길이는 얼마 안 됐다. 60여 미터 정도나 됐을까.      


불과 하루 전 수백 명이 옴짝달싹 못한 채 뒤엉켜 생사를 다퉜던 곳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쓰레기만 뒹굴고 있었다.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년의 사내 둘이 “정부가 못나서,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못해서 그렇다”라고 수군댔다.     


시간은 어느새 정오를 가리켰다. 사고 현장 맞은편 2층 식당을 찾았다. 국밥 한 그릇을 시켜놓고 식당 주인에게 사고 당시 상황을 들을 참이었다. 안에는 이미 여럿의 기자들이 주인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고 있었다. 주인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같은 질문을 수십 번도 넘게 들었을 테니 대답하기가 얼마나 귀찮았을까.  

    

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는 참사를 애도하는 이유로 일주일 동안 문을 닫았다. 그렇다 보니 근처에 문을 연 국밥집에만 취재진이 몰렸다. 주인은 “기자들 밥이라도 해 주려고 문을 열었다”라고 했다. “뉴스에 다 나왔는데, 같은 얘길 몇 번이나 해야 하니 힘들다”라고 하소연했다.      


20대로 보이는 여성 둘이 내 옆자리에서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망설임 끝에 말을 걸었다. 그들은 내 질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밥 먹으러 왔는데, 그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라고 거절했다. 괜스레 미안했다.  


식당을 나와 이동한 곳이 녹사평이었다. 분향소는 녹사평역 3번 출구에서 15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분향소를 설치한 지 얼마 안 지났고, 평일 낮 시간대라 조문객보다 기자들이 더 많았다. 줄을 서지 않을 정도로 한산했다. 10월의 마지막 날, 하늘은 유난히 높고 푸르렀다.     


분향소에 들어가 국화 한 송이를 받아 들고 희생자를 애도했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또 빌었다. 누군가의 아들딸이었고, 손자였고, 친구였고, 배우자였을. 그날 밤, 그들은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다음 날, 지인이 검은 양복을 입고 나를 만났다. 대낮부터 “소주나 한잔하자”라며 연락했다. 그날, 그의 딸은 둘도없는 친구를 이태원에서 잃었다고 했다. 나와 만나던 날, 그는 아내와 딸과 함께 합동분향소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날 밤, 나와 그는 인생이 무엇이냐, 국가가 무엇이냐, 누가 죄인이냐고 따지며 울고불고했다.      


전쟁기념관 앞에선 오늘도 대통령실을 향한 집회와 시위대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뒤섞여 있다. 무더위가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 더위가 지나가면 가을이 오겠지. 그리고 이용이 부른 <잊혀진 계절>이 떠오르는 10월이 오겠지. 이루지 못한 청춘들의 꿈, 그들의 인생을 앗아간 10월의 마지막 날도 오겠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 배호 <돌아가는 삼각지> 中

**은유『쓰기의 말들』 (유유, 2017) 87쪽

*** 이용 <잊혀진 계절>  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