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과 녹사평에 다녀왔던 날을 기억한다. 분향소를 찾은 조문객들 표정은 숙연했다. 하나같이 비통한 모습이었다.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불쌍해서 어찌할거나, 곡하는 이도 있었다. 애도의 방식은 제각각이었다. 참사의 충격이 워낙 컸던 만큼, 내 가족이 아니어도 추모행렬은 전국으로 이어졌다. 정부는 ‘국가 애도 기간’까지 선포했으나, 누구도 참사에 책임지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아프게 떠났을 사람들. 죽기 직전 겪었을 고통과 공포, 더는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을거란 두려움, 왜 하필 이렇게 생을 마감해야 하는지에 대한 억울함. 그들의 가족은 또 어찌할거나. 원통하고 애통해서 어찌할 거나. 나는 그들의 심정을 십 분의 일 정도는 안다. 나 역시 길 위에서 가족을 잃어본 유족의 한 사람이니까.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사람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과 상처, 그리고 분노로 잠 못 이뤘으리라.
그런 걸 보면, 인생이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는다고 탓할 일만은 아니다. 그날 거기에 있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도. 우주라는 세계에서 숨이 붙어있는 ‘생명체’라는 존재 이유에 감사해야 할지도.
예상치 못한 죽음이나 격렬한 죽음 앞에서는 흔히 ‘복합적 애통(complicated grief)’이라는 감정에 빠진다. 이때는 고통이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쳐 끈질기게 이어진다. 애통에는 엄격한 시간표나 정해진 스케줄이 없기에 정확히 언제 털고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긴 해도 대다수는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쳐 앞으로 나아간다. 떠나간 사람을 날마다 생각하긴 하지만, 그 사람이 없는 새로운 삶을 어떻게든 꾸려나간다. *
정말 몇 달이 가고, 몇 년이 지나면 애통한 마음이 가실까. 아무렇지 않은 듯, 내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시간이란 게, 그렇게 모든 걸 치유해 줄 수 있을까. 애통한 죽음이란, 그 찰나의 순간을 떠올렸을 때, 내 눈에선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문밖에선 소나기가 후드득 떨어졌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금방 멈출 줄 알았던 비가 꽤 길게 왔다. 차를 몰고 산사로 향하는 내내 와이퍼가 연신 앞 유리를 닦았다.
삼십 분쯤 걸렸을까. 산사 어귀에 이르렀다. 동동주와 도토리묵을 팔던 허름한 식당 하나가 있었는데, 불교용품점으로 바뀌었다. 절에 오르는 길 양쪽에는 오색 연등이 줄줄이 사탕처럼 매달려 있었다. 초파일이 하루 전이었다. 산 능선에는 빗물을 잔뜩 머금은 물안개가 자욱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우산 쓴 사람들을 따라 대웅전으로 갔다. 가는 길에도 곳곳에 연등이 달렸다. 비 비린내에 묻혔는지, 향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여기서 나는 아버지 49재를 지냈다. 어머니는 매년 초파일을 앞두고 아버지 이름을 적은 연등을 달았다.
본당에 들어가 방석 하나를 가져다가 석가모니불 앞에 앉았다. 가만히 앉아 삼존불을 올려다봤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장한다는. 참 너그럽게도 생겼다. 금방이라도 자비가 쏟아지게 생겼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백팔 배도 하고, 나무관세음보살을 찾는 걸까. 나는 조용히 일어나 절을 했다. 무릎이 안 좋아 백팔 배는 하지 못하고, 팔 배만 했다. 백팔 배든, 팔 배든 횟수가 중요하랴.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한다는데. 여덟 번만으로도 심란했던 마음이 다스려졌으니, 족하다.
방석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나왔다. 빗줄기는 더 거세졌다. 본당 댓돌에 앉아 추녀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었다. 절 주변을 감싸고도는 숲과 나무의 풍경에 타닥, 타닥 쏟아지는 빗소리를 더하니 그야말로 운치를 더했다. 빗속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했던 기분이 떨어지는 빗소리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여덟 번 만의 절에도 부처님은 나에게 더없는 자비를 베푸나 보다, 싶었다.
살이 꺾인 우산을 고쳐 쓰고 칠성각을 지나 본당 위쪽으로 올라갔다. 동양에서 가장 큰 청동 불상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어릴 적 아버지 손 잡고, 어머니 손잡고 와서 보고 깜짝 놀라 입이 떡 벌어졌던. 그래서 그 앞에서 사진도 찍고, 기도도 드렸던 기억이 난다. 청동 불상은 수십 년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랜 시간 앉아 있으면 지겨워서라도 일어나고 싶을 텐데, 어떻게 참고 있는 걸까. 하긴 부처의 머리가 곱슬인 것도 이유가 있으리니.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하기 위해 집 근처 절에 있는 상좌스님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다. “스님, 왜 부처님은 곱슬머리인 거예요?” 내 질문에 수화기 너머 스님은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설명했다. “석가모니께서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오랜 시간 수행 중이었단다. 수행하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으니, 새들이 사람인 줄 모르고 날아와 머리 위에 집을 지었지. 석가모니는 그것에도 아랑곳없이 수행을 계속했단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다 보니 곱슬머리가 됐단다.” 그때 나는 스님의 말을 믿었다.
석가모니는 얼마나 오랫동안 꼼짝하지 않고 수행했을까. 열반에 들어 부처가 될 때까지였을까. 허리는 안 아팠을까. 끼니는 어떻게 했고, 화장실은 또 어떻게 해결했을까. 되지도 않는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산사의 나뭇가지에 새 한 마리가 비를 맞은 채 오들오들 떨면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새를, 새는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며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새는 어디론가 날아갔고, 나는 주차장 앞 나한전 앞에 도착했다. 나한전은 몇 해 전 신축했다. 안에는 1,000개가 넘는 나한상이 모셔졌다. 내 아버지 ‘존자(尊者)’도 그중 한 곳에 있었다. 존자 이름은 ‘군두바한’.‘왕의 시중을 받고 한곳에 집중해 깨달았으며, 식권을 얻는 이들 가운데 제일의 자리에 놓인 존자’라고 적혀 있었다. 극락왕생이 있을 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세상에선 먹을 걱정만큼은 안 하시겠구나. 존자 앞에서 두 손 모아 합장했다. 생로병사가 없는 곳에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는 곳에서 평안하시길.
돌아오는 길, 차 안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켰다. 날은 여전히 어둡고 을씨년스러웠다. 비는 가늘고 약하게 뿌렸다. 차창 밖으로 새 한 마리가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산사에서 봤던 그 새인지는 모르겠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면서도 나는 왔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나는 있고
어느 때인지 모르면서도 나는 죽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도 나는 간다
사랑할 줄 모르면서도 사랑하기 위하여
강물을 따라갈 줄 모르면서도 강물을 따라간다
산을 바라볼 줄 모르면서도 산을 바라본다
모든 것을 버리면 모든 것을 얻는다지만
모든 것을 버리지도 얻지도 못한다
산사의 나뭇가지에 앉은 새 한 마리
내가 불쌍한지 나를 바라본다
무심히 하루가 일생처럼 흐른다**
* 샐리 티스데일 지음, 박미경 옮김『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Being, 2019) 285쪽
**정호승 시집『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 2022) 24쪽 <무심(無心)에 대하여>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