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월남쌈을

위기에서 빛난 구원투수의 부상 투혼

by 류재민
휴일 아침 딸과 함께 월남쌈을 쌌습니다.


열 살 딸이 일주일 전부터 할머니께 손수 만든 월남쌈을 해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오늘이 그날이었는데요. 문밖에는 월남쌈 재료가 새벽 배송으로 도착해 있었습니다. 라이스페이퍼와 오이, 파프리카, 부추, 적 양배추 등등.


문제는 딸이 갑작스러운 부상을 입은 겁니다. 방에서 동생과 놀다 담이 들었는지 상태가 영 좋지 않았습니다. 목에 찜질팩을 해주었는데 차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운도 없어 보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침대에 누워 쉬라고 하고 방을 나왔습니다.


아내가 말합니다. “딸이 월남쌈 못 만들게 됐으니, 아빠가 해야겠네.”


헐. 그게 그렇게 되나요? 하기야 제 어머니 드릴 음식이니 제가 만드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어제 브런치에도 썼듯이, 저는 요리교실은 다녔어도 2년 동안 실전 감각이 없습니다. 투수도 그렇지만, 연습 피칭 없이 마운드에 올라가면 자신감이 떨어집니다. 난타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래도 별수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없고, 딱히 등판할 선수 자원이 없으면 연습생이라도 출전해야 하니까요. 주방 마운드에 오르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불펜 투수코치 노릇을 합니다. “한 번만 알려준다. 잘 보고 따라 해 봐.” 그러더니 월남쌈 하나를 순식간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내 딴에는 쉽고 천천히 했다는데, 제가 보기에는 눈 깜짝할 사이에 뭐가 하나 생겼습니다. 아내는 “이제부터는 당신 손에 달렸다. 건투를 빈다”며 홀연히 주방 마운드를 떠났습니다. 이제부터 온전히 저만의 시간입니다. 일구 일구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월남쌈 재료를 망칠 위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 벌써부터 아내의 잔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옵니다.


일단 미지근한 물에 라이스페이퍼를 담급니다. 부들부들해질 때까지 앞뒤로 휘휘 돌린 다음 넓적한 접시에 올려놓습니다. 그 위에 채 썬 오이와 파프리카, 부추, 적 양배추를 올려놓습니다. 오이와 부추의 초록색, 노란색과 빨간색의 파프리카, 적 양배추의 보라색이 그럴듯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다음은 김밥을 말 듯이 돌돌 말아주면 됩니다. 문제는 이 과정이 가장 어렵다는 겁니다. 자칫 잘못하면 라이스페이퍼가 접혀 말기 기술에 에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라이스페이퍼 끝을 조심스럽게 떼어 야채를 살짝 덮습니다. 그리고 양옆을 접고 나서 돌돌 굴렸습니다. 드디어 첫 작품을 완성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리보고 조리 봐도 뭔가 어색합니다. 마치 흐물흐물한 물만두처럼 매가리가 없어 보입니다. 그때였습니다. 방에 누워 있던 딸이 힘없이 걸어 나왔습니다. 아빠 혼자 월남쌈 만드는 게 영 못 미더웠나 봅니다. 구원투수의 등장에 제 맘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아, 이제 살았구나’


담이 들어 방에 누워있던 딸이 구원투수로 등판해 라이스페이퍼를 물에 적시고 있습니다.
라이스페이퍼에 갖은 야채를 넣고 쌈을 싸는 딸의 모습이 경이롭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이게 월남쌈이야, 보쌈이야.”
제가 만든 첫 번째 월남쌈을 본 딸이 혀를 차며 말했습니다. “일단 안에 물기가 너무 많아. 그리고 라이스페이퍼를 쌀 때 재료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해야 예쁘게 말린다고요.”
“아하, 그렇구나. 몰랐네. 우와, 우리 딸 잘하네. 잘해.” 저는 딸이 월남쌈 만드는 걸 어깨너머로 보면서 몇 개를 더 만들었습니다. 부상 투혼을 발휘한 딸과 주방보조 아빠의 활약에 월남쌈 한 냄비가 가득 찼습니다.

어머니 집으로 가는 길에 월남쌈과 같이 먹을 불고기도 조금 샀습니다. 손녀딸이 만든 월남쌈을 겨자 소스에 찍어 드신 어머니는 무한감동을 받으셨고, 그 광경을 보는 딸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습니다. “제가 아프지만 않았으면 더 잘했을 텐데.. 그래도 아빠가 옆에서 도와줘서 금방 끝났어요.”


아빠의 노력까지 할머니께 이실직고해 준 덕에 제 체면이 살았습니다. ‘딸, 고마워! 오늘 고생했어. 푹 자고 나면 내일은 하나도 안 아플 거야. 다 나으면 아빠랑 또 월남쌈 만들자.’

할머니 앞에 차려놓은 손녀딸의 작품입니다. 작품명은 '아빠와 딸의 월남쌈 블루스'

※이 글을 본 딸이 말했습니다. “아빠, 월남쌈은 해봤으니까, 다른 종목으로 도전! 오케이?” “....”


오늘은 이적의 <당연한 것들>입니다. 요즘 같은 시기 공감 가는 노래입니다.

*영상 출처: [Lyric Video] Lee Juck(이적) _ Things We Took For Granted(당연한 것들)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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