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전쟁

4

by 류재민

이윤의 집 사랑채, 호롱불 아래 십여 명의 수인 중진이 모였다. 대비의 간택령을 접했는지 제 할 말만 하며 소란스러웠다. 방문이 열리고 이윤이 들어왔다. 수군대던 사람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이윤이 상석에 앉자마자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대체 그 불여우가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려는 것입니까”

“즉위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가례를 올린단 말입니까?”

“화인 쪽을 중전으로 앉히려는 계략일지 모릅니다.”

이윤은 눈을 감은 채 쏟아지는 말들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나올만한 말들이 다 나왔다고 여겼을 즈음, 닫혔던 입을 열었다.

“화인은 아닌 듯싶소. 다만, 부원군이 처형되자마자 중전을 들인다는 건, 대비의 머릿속에 또 다른 허수아비를 세우겠다는 의도가 분명해 보입니다.”

이윤의 말에 모두가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누구를 중전 후보로 내면 좋겠소?”

이윤이 좌중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다. 다들 후환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부원군처럼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숨기지 못했다.

이윤은 실망한 눈빛으로 일갈했다.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어찌 우리가 왕을 세운 세력이라고 할 수 있겠소!”

그러자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당수께서 나서는 게 어떻겠습니까.”

모든 시선이 일제히 이윤에게 쏠렸다. 그 말은 이윤의 외동딸 이현을 두고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현은 용모가 수려할 뿐만 아니라, 총명하기로 유명했다. 나이는 열일곱이었다.

이윤은 결단의 기로에 섰다. 하지만 결단을 내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인의 명운이 달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좋소. 내 딸을 궐로 들이겠소.”

이윤의 중대 결단에 중진들은 큰 짐을 내려놓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중진들을 보낸 이윤은 별채에 있는 이현의 방으로 향했다. 자수를 놓고 있던 현은 늦은 밤 부친의 방문에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현아.”

이윤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딸을 바라보는 이윤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이윤의 불안한 표정과 달리 현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너도 이제 좋은 짝을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

현은 부친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어디서 혼사가 들어왔나요?”

이윤은 현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놓인 자수를 응시했다. 흰옷을 입은 여인이 승천하는 용의 등에 앉아 피리를 불고 있었다. 땅에선 이리떼가 고개를 치켜든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먹잇감을 놓쳤다는 듯 우우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이리떼보다 무섭고 다루기 힘든 용의 등에 올라탄 걸 보니, 여인의 배포가 범상치 않구나.”

이윤은 자수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건, 여인이 아닙니다.”

“여인이 아니면 누구더냐?”

이윤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옥황상제가 빙의한 것입니다. 행색은 약한 여인처럼 보일지 모르나, 눈으로 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표현해봤습니다.”

현의 설명에 이윤은 감탄했다. 동시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호, 단순한 자수인 줄 알았더니 심오한 뜻을 품고 있었구나.”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현은 부친의 칭찬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궐에서 중전을 들인다는구나. 우리는 너를 추천하기로 했다.”

현은 중전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아버지, 전하는 일곱 살이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열 살이나 더 많습니다. 그런데 어찌….”

“나이로 중전을 들이는 게 아니다. 가문과 수인이 살아남으려면 이 길뿐인 것을 어쩌겠느냐.”

이윤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현은 되레 빙긋이 웃었다.

“아버지, 괘념치 마세요. 제가 궐로 가겠습니다. 가서, 이리떼를 따돌리고 용을 길들이는 옥황상제처럼 가문을 지키고 수인을 지키겠습니다.”

당당한 어조로 말하는 현의 말을 들은 이윤은 순간 숨이 턱 멎는 듯했다. 딸이 총명하다는 걸 알곤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대범한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고맙구나. 그리고 미안하구나.”

이윤은 현의 손을 꼭 잡았다. 참았던 눈물도 뺨을 타고 흘러나왔다. 당수로서 절박함과 아버지로서 부성애가 동시에 전해졌다.

“염려 놓으세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밤은 깊었고, 대문 밖에선 순찰 나온 포졸들이 허리춤에 찬 종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같은 시각, 이태겸은 서재에 홀로 앉아 있었다. 등잔불은 하나만 켜 두었다. 서재 한가운데 놓인 책상 위에는 족보와 인명록, 그리고 빈 종이 한 장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붓을 들었다 내려놓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중전.

두 글자가 머릿속을 꽉 채웠다. 이태겸은 손을 뻗어 족보를 펼쳤다. 화인 가문의 여인들 이름이 빼곡했다. 나이, 혼인 여부, 외가, 병력, 성정에 대한 짧은 평까지 적혀 있었다. 하나같이 흠잡을 데 없었다.

그는 그중 몇 사람을 시선을 두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때 화살이 날아와 어딘가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이태겸은 서재에서 나와 주위를 살폈다. 서재 기둥에 깊게 박힌 화살에 종이가 걸려 있었다. 그는 화살을 잡아 빼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는 이현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태겸은 그 이름에 손가락을 댔다.

이현. 이윤의 딸.

가문, 혈통, 나이, 모두 흠이 없었다. 무엇보다 민 대비가 꺼릴 이유가 없었다. 아니, 꺼릴 이유가 없다는 점이 오히려 무서웠다.

이태겸은 등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에는 웃음도, 분노도 없었다. 대신 아주 오래 생각한 사람 특유의 굳은 표정만 남아 있었다.

‘대비는 이미 정했겠지.’

그는 확신했다.

간택령은 선택을 위한 명이 아니라, 선택이 끝났다는 알림이었다.

화인과 수인을 불러들인 것은 공정함을 가장하기 위함이고, 패를 꺼내 보이기 전 상대가 가진 패를 확인하려는 수였다는 걸.

이태겸은 붓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붓끝은 좀처럼 종이에 닿지 않았다.

‘후보를 내는 순간, 우리는 패를 드러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서재 안을 빙빙 돌며 골똘히 생각했다.

이현이 중전이 된다면, 화인은 무엇을 얻게 될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반대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수 있다.

“화인이 밀어준 중전”이라는 말 하나면 충분했다.

이태겸은 서가 앞에 멈춰 섰다. 낡디 낡은 병서 한 권을 꺼내 펼쳤다. 책 귀퉁이에 적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 싸움에서 이길 수 없을 때는, 싸움이 아니게 만들어라.

그는 책을 덮었다.

“맞아, 이거였어.”

말은 소리 없이 흘러나왔다. 화인은 중전 후보를 내지 않는다. 그게 결론이었다. 이태겸은 지체없이 종들을 시켜 화인 회의를 소집한다는 전갈을 넣었다.

사랑채 안에는 적은 인원만 모였다. 말 많은 이들, 성질 급한 이들, 얼굴에 계산이 드러나는 이들은 부르지 않았다. 이태겸이 아직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한 소수였다.

“당수 어른.”

누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중전 후보는 정하셨습니까?”

이태겸은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사람들 눈이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그의 입에 쏠렸다.

“내지 않겠소.”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멎었다.

“대비께서 분명 후보를 데려오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알고 있소.”

이태겸은 말을 끊었다.

“그래서 내지 않겠다는 거요.”

한 중진이 나섰다.

“대비가 우리가 기권한 걸 알면 괘씸히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소.”

또 다른 중진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따졌다.

“그럼 수인 쪽에서 올린 후보로 간다는 말씀입니까? 당치도 않습니다. 그 꼴을 어찌 두고 볼 수 있습니까.”

“두고 보다니.”

이태겸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는 이현의 이름을 당장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수인은 자기 패를 올릴 겁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는 발을 뺍니다.”

이태겸은 손바닥을 한 번 털 듯이 움직였다.

“화인은 이 간택에 아무런 이해도, 추천도, 책임도 없소.”

누군가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하면 왕과 왕비 모두 수인 수중에 들어가는 겁니다.”

“되기 어렵게 만들면 되지요.”

그 말은 낮았지만, 회의장을 단번에 가로질렀다.

“당수 어른, 설마….”

“적당한 시기에 낙마시킬 겁니다.”

이태겸은 단호했다.

“다만, 우리가 손을 쓴 것처럼 보이지 않게.”

중진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태겸은 그들의 반응을 충분히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중전은 왕의 여인이지, 당수의 여인이 아닙니다.”

이태겸은 그제야 첩자로부터 받은 수인의 중진 후보가 누군지 공개했다.

“그 아이가 똑똑하다는 말이 있더군요.”

“그래서 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이태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하면 대비의 도구가 되거나, 대비의 적이 됩니다. 중간은 없소.”

그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한 번 탁 쳤다.

“흠을 만들 겁니다.”

“흠이라면 어떤….”

“욕심.”

방 안이 조용해졌다.

“욕심은 가장 만들기 쉬운 흠이지요. 그리고 가장 믿기 쉬운 흠이기도 하고.”

이태겸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중전 자리를 욕심냈다. 아비의 권세를 등에 업었다. 왕보다 앞서 움직였다.”

“하지만 증거가….”

“없으면 만들면 될 문제요.”

그는 잘라 말했다.

“먼저 소문이 돌아야 합니다.”

중진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가 먼저 움직입니까.”

이태겸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때를 기다릴 겁니다.”

“대감?”

“움직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까.”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수인 내부에.”

그 말에 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이해했다는 표정이었다.

“기억하시오.”

이태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소. 중전 후보도, 반대도, 전략도 없었소.”

그는 천천히 일어났다.

“다만, 대비가 만든 판이 얼마나 기울어져 있는지만 확인했을 뿐이오.”

회의는 그 말로 끝났다. 남은 이들은 서로를 보지 않은 채 하나둘 자리를 떴다. 등잔불만 남은 사랑채에서, 이태겸은 혼자 중얼거렸다.

‘중전은 왕의 여인이지, 살아남은 자의 자리가 아니다.’

닷새가 지났다. 편전 옥좌에는 왕이 앉았고, 그 대각선으로 발을 길게 내린 자리에 민 대비가 앉아 이태겸과 이윤을 바라봤다. 신하들이 선 자리에선 대비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대비가 앉은 곳에서는 그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 그럼 어디 말씀들 해보시지요. 중전 후보로 누굴 추천할지.”

민 대비가 물었고, 왕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이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마마, 수인 쪽에서는 제 여식을 추천하기로 했사옵니다. 부족한 아이지만, 흠결 없이 키웠습니다. 수인의 당수로서, 그리고 아비된 자로서 이 나라의 국모로 적임자라고 자부합니다.”

민 대비는 이윤이 자신의 딸을 중전 후보로 올린다는 말에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적잖이 놀랐다. 수인의 당수가 금지옥엽 키웠을 외동딸을 궐에 들이겠다는 건, 그야말로 목숨을 건 승부수라고 봤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화인은요?”

대비의 시선이 이태겸을 향했다. 이태겸은 마음의 준비가 됐다는 듯 대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비마마, 제가 무능하며 화인에서는 마땅한 중전 감을 찾지 못하였나이다. 명을 받들지 못한 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이태겸은 이마를 바닥에 대고 읍소했다. 민 대비는 화인이 기권한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윤사월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처형당한 윤영식의 전철을 밟기 두렵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어리석은 건지, 현명한 건지.”

민 대비는 짧게 말했다. 그게 전부였다. 자연스럽게 중전 후보로는 이현이 추대됐다. 다만, 대비는 검증절차는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상께서 아무리 잘 가르쳤다고 해도, 중전의 자리는 호락호락한 자리가 아닙니다. 중전으로 자격이 있는진 내가 살펴보고 판단하겠소.”

대비의 말은 끝났고, 당수들은 물러갔다. 편전에는 왕과 대비만 남았다.

“주상, 주상도 이제 처소로 돌아가시지요.”

어린 왕은 말없이 왕좌에서 내려왔다. 대비가 발을 걷고 일어나 돌아서려는 찰나, 등 뒤에서 왕이 말했다.

“대비 마마, 부인될 자를 맞는데, 제 의견은 묻지 않으십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궐에 들어온 이후로 왕은 먼저 말하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따지듯 물었다. 그것도 서슬 퍼런 대비를 앞에서. 대비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하마터면 손이 올라갈 뻔했다. 하지만 이내 돌아서서 한없이 상냥한 얼굴로 왕에게 답했다.

“중전 간택은 내명부의 일입니다.”

“몰랐습니다, 송구하옵니다.”

대비는 열린 문으로 나가다 멈췄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서 이번에는 노려보듯 말했다.

“주상, 왕은 묻는 자리가 아닙니다. 정해지면 따르는 자리입니다.”

대비의 말에 왕은 목이 졸리는 듯 숨이 턱 막혔다.

“잘못했습니다, 마마. 다시는 묻지 않겠습니다.”

대비는 왕의 바지가 젖는 걸 봤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대비가 나가자마자 왕은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왕은 내관의 등에 업혀 침소로 돌아갔다. 다음 날, 왕을 가르쳤던 대제학의 목이 저자에 걸렸다. 왕실을 능멸하고 왕을 기망한 죄였다. 왕은 점점 고립됐다.

*

대비전 뒤편에는 평소 쓰지 않는 좁은 회랑이 있었다. 그곳으로 이결이 들어왔다. 등을 밝히는 등잔은 하나뿐이어서 어두컴컴했다. 내금위장이 앞서 걸었고, 이결은 그 뒤를 따랐다. 그는 다시 궐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나갔을 때도, 돌아왔을 때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궐이 그를 삼켰다가, 다시 토해낸 것 같았다.

회랑 끝에서 내금위장이 멈췄다. 손으로 밀실을 가리켰다. 내금위장은 이결을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들어가라는 신호였다. 이결은 문을 옆으로 밀고 들어섰다.

안에는 민 대비 혼자 앉아 있었다. 상궁도, 나인도, 내관도 없었다. 다과도 없었고, 서책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대비는 아무것도 없는 상 위에 두 손을 얹고 있을 뿐이었다. 이결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무릎을 꿇으라는 말이 없었지만, 그는 자연스레 몸을 낮췄다.

“살아 있더냐.”

민 대비의 음성은 건조했다. 안부를 묻는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확인만 있었다. 이결은 답하지 않았다. 살아 있다는 말이 허락된 말인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비는 잠시 이결을 바라봤다. 눈길은 오래 머물렀지만, 감정은 실리지 않았다. 사람을 보는 눈이라기보다, 쓰임을 정한 물건을 점검하는 눈이었다.

“네 목숨은, 아직 쓸모가 있다.”

이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비는 그 반응을 굳이 짚지 않았다.

“이윤과 이현.”

대비가 두 이름을 나란히 불렀다. 이결은 자신이 왜 불려왔는지 알았다. 그리고 그걸 알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두려웠다.

“하나는 왕의 곁에 들이려는 여자이고, 하나는 그여자의 아비다.”

대비는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이미 정리된 사실을 읊조리는 듯했다.

“겉으로는 깨끗하지. 너무 깨끗해서 탈이야.”

대비는 손가락으로 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규칙적으로 탁탁거리는 소리가 방안의 질서를 만들었다.

“사람이든 가문이든, 약점이 없는 법은 없다. 드러났느냐, 숨겨졌느냐의 차이지.”

이결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윤과 이현. 하나는 수인의 수장이고, 하나는 곧 중전이 될지도 모를 여인. 그들의 이름이 이렇게 조용히, 이 밀실 안에서 처리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결을 궁지로 몰아갔다.

“가서 가져오너라.”

대비가 명했다.

“그들의 약점. 크지도, 많지도 않아도 된다. 대신 확실해야 한다.”

“마마….”

이결의 입에서 첫마디가 나왔다. 대비의 눈이 즉시 그에게로 향했다. 이결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쉽진 않을 것이야.”

대비가 먼저 말했다.

“그래서 널 부른 것이다.”

그 말은 위로도, 격려도 아니었다. 선택의 이유였다.

“너는 이미 죽었다. 그러니 살아 있는 자들이 숨기는 걸 볼 수 있다.”

이결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았다. 그는 이제 체면도, 지위도, 이름도 없었다.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접근할 수 있었다. 들키지 않아도 되는 사람, 사라져도 문제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기한은 열흘이다.”

대비는 일어나지 않은 채 말했다.

“이윤이든, 이현이든 하나만 가져와도 된다. 하지만 둘 다라면….”

대비는 말을 멈췄다. 그 뒤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실패하면 어찌 됩니까?”

이결이 물었다. 평정을 잃지 않으려 애썼지만, 목소리 끝이 떨렸다.

“그땐, 정말로 죽는 거지.”

대비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결은 더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만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가거라.”

대비의 말이 떨어지자 밖에서 내금위장의 발소리가 들렸다. 이결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문을 나서기 직전, 대비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기억해라.”

이결의 발이 멈췄다.

“약점이란 건, 들추는 순간부터 제 것이 아니다.”

문이 닫혔다. 혼란을 줄일 수 있다면, 누군가는 사라져도 되는 법이었다. 이결은 그것을 이해했다고 여겼다. 그는 다시 어두운 회랑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돌아가는 길이 더 멀게 느껴졌다. 숨을 고르고, 품 안을 확인했다. 차가운 촉감의 단도가 만져졌다. 이결은 조용히 생각했다. 살아남았다는 건, 아직 죽을 일이 남았다는 뜻이라는 걸.

‘저 아이는 알까. 왕은 길을 고르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깔린 길에서 발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란 걸.’

이결은 대비전을 빠져나오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출 윤사월이 하루아침에 군왕의 자리에 앉았고, 그 대가로 부친이 목숨을 내놓는 기괴한 상황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대비의 사냥개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알아챈 순간, 입가에 마른 웃음이 걸렸다.

이결은 날이 밝기 전, 궐을 빠져 나왔다. 새벽 공기는 아직 사람 냄새를 품지 못해 차가웠다. 이결이 호흡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성문을 나서는 동안 누구도 그를 막지 않았고, 누구도 불러 세우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스스로 무너지게 하라.

대비의 말은 간단했다. 그게 전부였다. 이결은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 곧 알게 됐다. 그날 밤, 이결이 향한 곳은 이현이 머무는 별채였다. 궐에서 멀지 않았고, 지나치게 가까워 오히려 의심을 피할 수 있는 자리였다. 담장은 높지 않았고, 경비는 느슨했다. 너무 느슨해서 이상할 정도였다.

‘이미 알고 있군.’

이결은 담을 넘으며 확신했다. 대비는 이미 이 집 구조도, 사람도, 쥐구멍까지도 알고 있었다. 이결에게 주어진 건 실행뿐이었다.

별채는 고요했다. 등불은 절반만 켜져 있었고, 창호지 너머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얼비쳤다. 이결은 숨을 낮췄다. 기척을 죽인 채 처마 밑을 따라 이동했다. 창 하나가 반쯤 열려 있었다. 안에서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씨,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멀었어. 대비마마의 눈은 그리 얕지 않아.”

이현과 몸종이 말을 주고받았다. 이결은 잠자코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들어갈 필요도, 들킬 필요도 없었다. 이 밤에 필요한 건 칼의 협박이 아니라 기록된 증거였다. 잠시 뒤, 이현은 종이를 접어 불 위에 올렸다. 불꽃이 종이를 핥듯 타고 올라갔다. 이결은 새끼손가락만 한 구멍을 뚫어 그 장면을 지켜봤다. 타지 않은 부분에 쓰인 문장도 똑똑히 봤다. ‘인사(人事)’라고 적힌.

그때, 안채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이결은 별채 뒤뜰로 몸을 숨겼다. 발걸음의 주인은 유모였다.

“아씨, 대감마님께서 찾으십니다.”

문밖에서 들려온 유모의 목소리에 방 안 공기가 가볍게 흔들렸다. 몸종과 종이를 태우던 이현은 잠시 동작을 멈췄다.

“아버님이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이현은 종이뭉치를 화로에 통째로 밀어 넣었다. 이내 몸종을 대동하고 방을 나섰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결은 소리 없이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화로에 타고 있는 종이뭉치를 꺼냈다. 불이 닿은 곳에 손이 데었지만, 긴장한 탓인지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타다 만 종이뭉치를 집어 들어 품속에 밀어 넣었다. 종이 질감이나 그 안에 적힌 글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내용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불에 타던 종이에 적힌 ‘인사’라는 두 글자가 무언지 짐작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적혀 있든, 이윤의 목숨줄이거나 혹은 이 가문을 무너뜨릴 독이 될 건만은 분명했다.

사냥개는 주인이 던져준 사냥감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그저 물어온 사냥감을 주인의 발치에 온전히 내려놓을 뿐이다.

이결은 설핏 깨달았다. 대비가 왜 이 일을 자신에게 맡겼는지. 칼을 잘 써서도, 말을 잘해서도 아니었다. 말없이 다녀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드는 사람. 그게 바로 대비가 이결을 쓰는 목적이었다. 궐 담장이 보이자, 이결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찬 구름이 달을 가리고 있었다. 그 밤, 이현의 방에는 그녀가 읽다 만 책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

이결이 대비전에 들었을 때, 민 대비는 혼자였다. 상선도, 엄 상궁도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했고, 향불 냄새가 옅게 감돌았다.

“왔느냐.”

민 대비는 이결을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이결은 무릎을 꿇었다. 종이뭉치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대비는 한참 뒤에야 시선을 내렸다.

종이뭉치를 집어 들고, 펼치지 않은 채 가장자리만 지그시 눌렀다. 인주 자국이 손끝에 묻어났다.

“이건 미처 못 태운 모양이군.”

“직전에 제가 가져왔습니다.”

그게 전부였다. 설명도, 부연도 없었다. 민 대비는 종이를 접어 옆에 내려놓았다. 여전히 펼쳐보지 않았다. 내용은 궁금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이미 확인돼 있었다.

“집은 조용했느냐.”

“예.”

“피는 묻히지 않았고.”

“예.”

이결은 자신이 대비에게 갖다 바친 물건이 이현의 목줄이 되겠다는 생각에 잠시 망설였다. 민 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다음은, 이윤이다.”

그 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이결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하나가 끝나면,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온몸으로 이해했다.

“이번에는 기록이 아니라 사람이다.”

민 대비는 그제야 이결을 보았다. 눈길이 꽝꽝 언 추녀 끝 고드름처럼 차가웠다.

“입을 열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언제 열리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이결은 고개를 숙였다. 이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오늘 일은 너와 나만 알아야 한다.”

“예, 마마.”

이결에게 그 말은 대비와 둘만 아는 비밀이 생겼다는 의미로 와 닿았다.

“넌 오늘 그곳에 다녀오지 않았다.”

민 대비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이결을 말없이 물러났고, 대비전에는 다시 정적이 깔렸다. 민 대비는 그제야 종이뭉치를 풀었다. 한두 장을 읽고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곧 접었다.

“이 정도면, 아이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 말은 누구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다. 대비는 등잔불을 낮췄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사냥개는 잘 짖지 않는다. 잘 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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