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전쟁

6

by 류재민

“너는 눈이 너무 맑구나. 자고로 사냥개는 눈이 흐려야 사냥에 집중할 수 있는 법인데.”

어둠 속 대비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이결에게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묵직하게 들렸다. 이결은 대답 대신 손바닥 화상 자국을 꽉 쥐었다. 그가 바친 종이가 중전의 목을 조르는 소리로 변해 담장 너머까지 들리는 듯했다.

“마마, 개는 눈이 아니라 코로 사냥을 합니다.”

이결은 고개를 숙인 채 낮게 읊조렸다. 바닥에 닿은 시선 끝에는 대비의 화려한 치맛자락이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피 냄새를 맡는 데에는 눈이 맑고 흐림이 상관없사옵니다. 제 눈이 마마의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다음번엔 눈을 가리고 들겠나이다.”

민 대비는 이결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길게 기른 손톱으로 찻잔을 챙, 하고 소리 나게 긁었다. 그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정적을 깼다.

“그래. 네가 코를 잘 써서 그 아이 방에서 귀한 물건을 물어오긴 했지. 하지만 말이다. 냄새를 잘 맡는 개는 주인이 숨겨둔 고기까지 찾아내려 들어 탈이란다.”

대비는 상체를 숙여 이결의 귓가에 속삭였다.

“중전의 방에는 들지 마라. 거긴 네가 맡아야 할 피 냄새가 없느니라. 그저… 멀리서 지켜만 봐라. 만약 그 아이가 주상에게 쓸데없는 걸 가르치려 들면, 그때는 네 눈이 아니라 내 손이 흐려질 것이야.”

이결은 뒷목에 닿는 대비의 숨결에서 기묘한 향취를 느꼈다. 그것은 권력이 가진 특유의 냄새였다.

*

대비전을 나온 이결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이결은 멈춰 서서 어둠에 잠긴 편전을 올려다보았다. 저 높고 위태로운 자리 위에 일곱 살 아이가 앉아 있었다.

대비의 권력은 거대한 바다와 같아 그 끝을 알 수 없었고, 어린 왕과 중전은 그 바다 위에 뜬 위태로운 돛단배 같았다. 이결은 손바닥의 화상 자국을 다시 한번 꽉 쥐었다. 그 고통만이 자신이 저지른 비극을 잊지 않게 해주는 유일한 닻이었다. 자신이 훔쳐 나온 그 종이 뭉치가 중전의 목을 옥죄고, 결국 왕을 고립시킬 것이다. 사냥개로 계속 살 것인가, 아니면 그 목줄을 끊고 굶주린 늑대가 될 것인가. 갈등은 짧았으나 그 무게는 생을 다 바쳐도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결은 궁의 서쪽 담장을 넘었다. 군사들의 순찰 시간을 꿰뚫고 있는 그에게 궐 밖으로 나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도성에서 얼마 떨어진, 인적이 끊긴 낡은 사찰이었다.

법당 안에는 낡은 장삼을 입은 여인이 등불 아래 찻잔을 두고 앉아 있었다. 이결은 문턱 너머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찾아뵈옵니다. 마마.”

그림자가 서서히 움직였다. 소복 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으나, 형형한 눈빛만은 궐의 주인임을 잊지 않은 여인. 선왕의 비이자, 민 대비 기세에 밀려 유폐되듯 쫓겨난 경희왕후였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결을 응시했다.

“대비의 개가 여기는 어인 일이냐. 이번에는 내 목숨을 가지러 온 것이냐?”

“목숨이 아니라, 마마의 손이 필요해 왔나이다.”

이결의 목소리에 단호함이 실렸다. 경희왕후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내 손에는 이제 경전을 넘길 힘조차 남지 않았다. 대비께서 이미 내 숨통을 다 끊어놓지 않았더냐.”

“아직 끊어지지 않은 숨통이 하나 더 있나이다. 일곱 살, 이제 막 가례를 올린 주상 전하이옵니다.”

‘주상’이라는 말에 왕후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이결은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대비께서는 사냥개가 눈이 맑다며 경계하셨나이다. 하여, 저는 그 맑은 눈으로 대비께서 보지 못하는 곳을 보려 하나이다. 마마, 제게 대비를 무너뜨릴 명분을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분의 목줄을 물어뜯겠나이다.”

법당 안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타들어 가는 촛불 심지 타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을 조율하고 있었다. 마침내 왕후가 마른 입술을 뗐다.

“대비를 죽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주상을 살리는 일은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보다 힘들 것이다. 너는 그 피비린내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제가 감당하지 못할 건, 이제 남아 있지 않사옵니다.”

왕후는 찻잔을 들었다 다시 내려놓았다. 찻물이 출렁이며 잔 밖으로 조금 흘렀다. 그녀는 이결의 머리 위로 시선을 던진 채, 매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선왕께서 어찌 돌아가신 줄 아느냐?”

이결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궐 안의 모두가 의심했지만, 누구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한 금기였다. 왕후의 목소리가 좀 더 낮아졌다.

“선왕께선 승하하기 전날 탕약을 드시다 피를 토하셨다. 어의는 말없이 침만 놓았는데, 차도가 없었다. 그러다 별안간 숨을 거두셨다. 그날 밤 편전의 불을 끄고 기록을 지운 자들이 누군지 아느냐?”

이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이 지금 주상 곁을 지키는 호위들이고, 대비의 발치에 엎드린 내관과 상궁과 신하들이다. 독은 이미 선왕 몸뿐만 아니라 이 궐 전체에 퍼져 있었다.”

왕후는 소매 안에서 작고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이결의 앞에 던졌다. 주머니에서 툭, 하고 검게 변한 은침 하나가 굴러 나왔다.

“그날 밤, 내가 어의 몰래 챙긴 것이다. 선왕의 마지막 숨이 닿은 증좌지. 이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 이 나라는 피바람이 불고 쑥대밭이 될 것이다.”

이결은 검게 탄 은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바닥 화상 자국이 다시 타오르는 듯 뜨거워졌다. 자신이 대비의 명령으로 훔쳐 온 종이뭉치는 중전의 가문을 흔드는 칼이었으나, 왕후가 던진 이 은침은 대비의 심장을 꿰뚫는 화살이었다.

“명분을 달라 했느냐? 이게 그것이다. 하지만 명심해라. 이 침을 뽑아 드는 순간, 너는 사냥개가 아니라 사냥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냥에 실패한 사냥꾼에게는 오직 죽음뿐이니까.”

이결은 떨리는 손으로 은침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졌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궐 안에서는 일곱 살 아이가 죽은 어머니를 닮은 여인과 위태로운 약속을 했고, 궐 밖에서는 한 사내가 죽은 왕의 피가 묻은 침을 품었다.

“명심하겠나이다. 마마.”

이결은 법당을 빠져나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궐을 향해 걷는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깊고 흐릿해져 있었다. 사냥꾼은 자신의 눈을 숨길 줄 알아야 했기에.

이결은 서쪽 담장을 넘어 그림자처럼 궐 안으로 스며들었다. 품 안의 은침이 닿은 가슴께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숙소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어둠 속에 늘어진 긴 그림자 때문이었다.

“밤공기가 찬데, 사냥개가 집을 비우면 쓰겠나.”

대비전의 엄 상궁이었다. 그녀의 뒤로는 횃불 든 내금위 군사들이 보였다. 이결은 본능적으로 칼자루를 쥐려다 멈췄다. 지금 칼을 뽑는 것은 경희왕후와 만남을 자백하는 꼴이었다.

“대비마마께서 기다리신다. 따라오너라.”

대비전 문이 열리자, 사향 냄새가 이결의 코끝을 자극했다. 민 대비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친 듯 얇은 적삼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이결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품 안의 은침이 바닥과 부딪혀 소리를 낼까 봐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대비는 이결의 눈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이 가슴께에 남았다.

“어딜 다녀온 것이냐?”

질문은 짧고 명확했다. 이결은 미동도 없이 대답했다.

“중전의 가문, 이윤의 사저 주위를 살피고 왔사옵니다. 마마께 바친 종이뭉치 외에 다른 잔당들이 있을까 염려되어….”

“그래? 그런데 왜 네 옷자락에서 절집 향내가 풍기느냐.”

대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결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대비는 냄새만으로도 그가 궐 밖 사찰에서 누군가를 만났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결은 화상 입은 손바닥을 바닥에 거칠게 문질렀다. 짓물러진 상처에서 배어 나온 진물이 바닥을 적셨다.

“사저로 가는 길목에 있는 폐사에서 잠시 몸을 숨겼나이다. 순라꾼들 눈을 피하려다 보니 냄새가 배었나 봅니다. 제 불찰이옵니다.”

민 대비는 천천히 일어나 이결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이결의 머리맡에서 멈췄다. 그녀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이결의 턱을 들어 올렸다.

“똑똑히 듣거라. 나는 거짓을 고하는 개는 키우지 않는다. 목줄을 끊는 건 한순간이지.”

대비의 서늘한 시선이 이결의 품을 훑었다. 은침이 든 비단 주머니가 요동치는 심장 소리에 맞춰 떨리는 듯했다. 순간, 이결은 오히려 대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제 목줄은 늘 마마가 쥐고 계시옵니다. 제가 다른 주인을 섬길 마음이 있었다면, 이윤의 약점을 마마께 바치지도 않았을 것이옵니다.”

민 대비는 한참을 이결을 노려봤다. 그러나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렸다.

“그래, 네 눈은 아직 맑구나. 가서 쉬거라. 대신, 다음번에도 향냄새가 나면 그땐 네 코를 베어버릴 것이다.”

대비전을 나오는 이결의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궐 밖 찬바람보다 대비의 미소가 더 소름 끼쳤다. 그는 어둠 속에서 은침을 매만졌다. 이제 이 침은 대비의 목을 겨눌 유일한 무기이자,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비수가 될 거라고 짐작했다.

대비전을 나온 이결은 어둠이 깊게 깔린 회랑을 지나 자신의 거처로 향하다 걸음을 멈추고 강녕전 쪽을 바라보았다. 일곱 살 왕이 잠들어 있을 곳. 아니, 아마도 잠들지 못하고 어머니를 닮은 여인의 품에서 떨고 있을 그곳.

이결은 품 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안에 든 은침의 끝은 여전히 검게 타 있었다. 선왕의 독살. 이 한 조각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는 날, 저 강녕전의 어린 주인은 진정한 왕이 될 수도, 혹은 가장 비참한 시체가 될 수도 있었다.

‘마마, 제가 본 것은 맑은 눈이 아니라 피로 물든 눈이었나이다.’

이결은 대비가 말했던 ‘맑은 눈’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이제 자신의 눈을 더 깊은 어둠으로 가려야 했다. 더 이상 사냥개가 아니라, 사냥꾼이 되기 위해서.

그때였다. 멀리 강녕전 문이 열리더니, 작은 실루엣 하나가 툇마루로 나왔다.

왕이었다. 면복을 벗고 잠행복 차림을 한 왕은 달빛을 받으며 서쪽 하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왕의 생모, 김 씨가 죽어 나갔던 방향이었다.

이결과 왕의 거리는 멀었다. 하지만 이결은 느낄 수 있었다. 왕의 시선이 아주 잠깐, 어둠 속에 숨은 자신을 스쳐 지나갔음을.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본능이었을까. 이결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이제 그 칼은 대비를 지키는 칼이 아니라, 저 외로운 아이의 밤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야 했다.

이결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왕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시야가 확보될 수 있을만한 거리에서 멈췄다.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던 왕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돌아섰다. 그리고 칼을 차고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필요 없었다.

“아니, 자네는.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왕의 눈은 크고 맑았고, 이결의 얼굴은 그 눈에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전하.”

이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였다. 왕은 멈칫했다.

“혼자 계시면 안 됩니다.”

그 말은 명령도, 충고도 아니었다. 사실에 가까웠다. 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빈 회랑과 닫힌 문들. 내관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잠깐…혼자 바람을 쐬고 싶었습니다.”

이결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바람이 찹니다.”

왕은 그 말의 뜻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따랐다.

강녕전 안쪽은 따뜻했고, 조용했다. 그제야 왕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앉았다. 안쪽에는 중전이 있었다. 이현은 창가에 서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고, 대신 손가락 끝이 소매 안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왕을 보고, 그 뒤의 이결을 보았다. 순간, 침전의 공기가 달라졌다. 이현은 아무 말 없이 왕에게 다가왔다.

왕의 옷깃을 한 번 살피고, 옷매무새를 고쳐주었다. 그 손길은 자연스러웠지만, 눈은 이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지 알겠습니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중전의 말은 공손했으나, 경계가 섞여 있었다.

이결은 무릎을 꿇었다. 깊지도, 얕지도 않게.

“명령이 아닌 일로 왔나이다.”

이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말이 오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이결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오늘 대비전에서 들은 말씀 중, 이해되지 않은 것이 있으시옵니까?”

왕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짧은 대답이었다.

이현이 왕을 바라보았다. 처음 듣는 솔직한 말이었다.

“이해하지 못하셔도 됩니다.”

이결의 말에 이현이 시선을 돌렸다.

“전하께서는 지금,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계십니다.”

“그럼…언제 이해해야 합니까?”

왕이 물었다. 아이답게 곧았다. 이결은 즉답하지 않았다. 대신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현의 시선이 그 위에 멈췄다.

“이건?”

“지금은 보여드릴 수 없사옵니다. 다만, 이것이 훗날 두 분 마마를 지켜드릴 건 분명합니다.”

왕은 주머니와 이결을 번갈아 보았다. 이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결은 협상을 하러 온 것도, 편을 정하러 온 것도 아니었다. 이미 정해진 편과 판에, 자신들을 끌어들이려는 중이었다.

“전하.”

이현이 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손길에 왕은 고개를 들었다.

“오늘 들은 말씀은, 다 잊으셔도 됩니다.”

“잊어도…된다고요?”

“네. 대신 기억해야 할 건 하나뿐입니다.”

이현은 이결을 보았다. 이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왕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누가 합니까?”

왕의 질문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결이 말했다.

“해야 할 사람은 이미 피를 묻혔습니다.”

이현이 그 말을 받았다.

“그리고 묻힐 준비를 한 사람도 있습니다.”

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무섭지는 않았다. 그날 침전에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돌지 않았다. 다만, 살짝 열린 문으로 보이는 대비전에 눈길이 한데 모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

민 대비는 최근 이결의 행동이 수상하다는 걸 직감했다. 김 씨의 자결을 유도하고, 이윤의 사저를 살피라는 지시는 내린 적도 없었다. 둘 다 이결의 독자적인 행동이었다. 순순히 명을 따르는 걸 넘어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건 명백한 독단이라고 판단했다. 염주 알을 굴리던 대비는 상선을 불렀다.

“근래 이결의 행동이 수상하다. 내금위장에게 일러 감시를 더 철저히 하라 일러라.”

“알겠사옵니다.”

상선이 물러간 뒤 대비는 염주를 내려놓고 문갑에서 함지를 꺼냈다. 그리곤 안에 든 종이뭉치를 한 장씩 넘기며 찬찬히 들여다봤다. 그건 이윤이 친필로 적은 인사문서였다. 수인의 핵심 명단이 여럿 적혀 있었다. 대비는 그것을 왜 이현이 보관하고 있었는지 어림짐작했다. 이윤은 딸이 중전으로 간택돼 궐로 들어가면 요소요소에 꽂아두려고 했을 것이다.

‘당수께서 국사를 농단하려는 수작을 벌이셨군요.’
대비는 함지를 제자리에 집어넣고 문갑 아래 자물쇠가 채워진 서랍을 열었다. 무명실로 짠 회색 면포가 보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면포를 걷어 젖혔다. 은침 다섯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색깔은 모두 검게 변해 있었다.

‘이건 아무도 봐선 안 된다. 절대.’

대비는 은침의 개수를 확인한 뒤 다시 자물쇠를 채웠다.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던 이결의 푸른 눈빛과 서랍 속 검은 은침들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돌았다.

다음 날, 조회가 끝난 뒤 대비는 어전 회의를 소집했다. 왕과 중전은 물론, 화인과 수인 핵심인사를 모두 불렀다. 긴 발을 내려뜨리고 앉은 대비의 손에는 종이뭉치가 들려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대비는 작심한 듯이 말했다.

“궐 안에, 쥐새끼가 있습니다.”

대비의 입에서 ‘쥐새끼’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편전의 모든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은 대비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렸고, 중전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꽉 맞잡았다. 이결은 편전 구석, 어둠이 짙게 깔린 기둥 옆에서 미동도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품속의 은침 주머니가 살을 찌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마마, 쥐새끼라니요. 궐 안에 어찌 그런 미물이 있겠사옵니까.”

화인의 수장, 이태겸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대비는 대답 대신 손에 든 종이뭉치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툭, 하고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진 종이들이 신하들의 발치까지 날아와 흩어졌다. 중전과 이윤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주상께서 아직 어리다 하여, 궐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며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중전의 아비라는 자가 주상의 인사를 제 손아귀에 넣으려 문서를 꾸미고, 그것을 궁 안으로 밀어 넣었소. 이것이 쥐새끼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대비의 시선이 이윤을 꿰뚫었다. 이윤은 황급히 엎드려 머리를 바닥에 짓찧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마마! 그것은 그저…!”

“그저 무엇이란 말이오? 주상을 보필할 신료들을 수인들로만 채워, 이 나라를 이 씨가 아니라 이윤, 당신의 나라로 만들려 한 것 아니오?”

대비의 호령에 편전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왕은 겁에 질린 눈으로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보았다. 그리고 손을 내려다봤다. 떨림이 멈춘 뒤에도, 손가락은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몸서리가 쳐졌지만, 중전의 손을 잡고 애써 참았다.

대비는 왕의 표정을 ‘공포’로 읽고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곧 기둥 뒤의 이결에게 향했다.

“나오너라.”

이결이 앞으로 나아와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 감쪽같이 사라져 이름만 남았던 이결의 등장에 화인과 수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왕의 옆자리에 앉은 중전을 바라봤다. 찰나의 눈 맞춤이었다. 중전이 먼저 시선을 꺾었다. 그건 대비의 의심을 피하려고 이결과 맺은 첫 번째 비밀스러운 ‘공모(共謀)’였다. 이결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품속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은침의 감촉을 느꼈다.

“너는 지금 당장 내금위와 함께 이윤의 사저를 샅샅이 뒤져라. 이 종이뭉치 외에 또 다른 ‘독(毒)’이 숨겨져 있는지 한 치 오차도 없이 찾아내야 할 것이야. 만약 숨기는 것이 있다면, 그게 누구든 그 자리에서 목을 쳐도 좋다.”

대비의 명은 잔인했다. 이결에게 이윤을 직접 처단하라는 명으로써, 이결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동시에 왕과 중전의 희망을 완전히 짓밟으려는 계산이었다. 이결은 중전의 떨리는 옆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대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명 받들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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