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밤이 깊었다.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암자에 불이 켜져 있었다. 윤사월의 생모, 김 씨가 머무는 처소였다. 그녀는 남편인 윤영식이 처형당한 뒤 이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첩 주제에 명문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윤영식의 본처는 김 씨를 야멸차게 몰아붙였다. 아들이 왕이 됐건만, 그녀는 윤가의 식구로 인정받지 못했다. 쫓겨나듯 집을 나온 그녀는 더 이상 왕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불리는 이름도 없었다. 불리는 이름이 없다는 건, 보호받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평소 시주하던 절을 찾았고, 그곳 주승이 암자 하나를 소개했다.
방에 켜둔 호롱불이 꺼질 듯 말 듯 했다. 김 씨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곤 바로 사라졌다. 방문을 열고 나온 김 씨는 신발 위에 놓인 서찰을 발견했다. 왕을 모시는 허 내관이 다녀간 것이다. 허 내관은 윤영식이 어린 왕이 대비에게 휘둘릴 것을 대비해 미리 심어 둔 심복이었다. 윤영식은 처형 전날 허 내관에게 왕과 김 씨의 내통 역할을 맡겼다. 허 내관은 어린 시절 굶어 죽어가던 자신과 가족을 살려준 윤영식이 생명의 은인과 같았다. 그의 말이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두 분을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허 내관은 이따금 대비전과 조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김 씨에게 알렸다. 김 씨가 거처를 암자로 옮기면서 사람 눈을 피해 발길을 하기에 더 편했다. 김 씨는 다시 불을 밝히고 허 내관이 남기고 간 서찰을 꺼냈다.
-이윤 대감의 일이 곧 드러날 것입니다.
김 씨는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윤영식은 생전 늘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기다려라.”
그러나 그 말은 더 이상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김 씨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잠시 뒤, 발소리가 다시 들렸다. 돌아가던 허 내관이 기별하지 못한 게 있어 돌아왔나 싶었다. 하지만 다른 전갈이었다. 겉봉투에는 ‘이결’이라는 이름과 대비전 인장이 찍혀 있었다.
-대비마마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김 씨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종이를 구겨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이결이라는 인물을 알지 못했다. 다만, 최근 궐 안에서 조용히 힘을 얻고 있는 자가 있다는 소식은 허 내관을 통해 듣고 있었다. 그가 직접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글은 충분히 말했다. 대비가 알았다면, 도망칠 곳은 없었다. 아니, 자신은 도망쳐 목숨을 건사해도 다른 수많은 목숨이 희생될 판이었다. 왕이 된 자신의 아들까지도.
김 씨는 머리맡에 둔 자리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은 잔잔했다. 흔들림 하나 없었다. 그녀는 물에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초라했고, 늙었으며, 무척 지쳐 보였다.
“사월아….”
그녀는 아들의 이름을 한 번 불렀다. 목이 메었다. 그 이름이 자신에게서 멀어질수록, 아이는 안전해질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 하나도 여기까지 버텼다.
동이 틀 무렵, 김 씨는 스스로 목을 맸다. 유서는 없었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처소 안에는 그 어떤 타살 흔적도 없었다. 죽음은 조용했고, 너무도 깔끔해서 의심조차 허락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소식은 곧 이윤에게 전해졌다.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 얼굴에는 놀람보다 당혹감이 먼저 서렸다. 이윤은 즉시 수하를 붙였다. 누가 먼저 김 씨에게 접근했는지, 어떤 말이 오갔는지 하나하나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수하는 ‘젊은 무관’이 김 씨 처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는 것밖에 알아내지 못했다.
“대비의 사람이었나?”
수하는 확답하지 못했다. 대비의 명이었다면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상선이든, 상궁이든, 나인이든 오가며 반드시 허 내관의 눈에 걸린다. 누군가의 귀에도 들린다. 그러나 이번 일에는 아무런 낌새를 차릴 수 없었다. 순식간이었고, 너무 정확했다.
이윤은 그제야 확신했다.
‘이건 대비의 손이 아니다.’
그는 천천히 손을 쥐었다 풀었다. 대비는 사람을 죽일 때, 두려움을 남긴다. 살아남은 자들을 떨게 만든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김 씨는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것이 이윤에게는 가장 무서운 지점이었다.
‘누가 판을 읽은 거지….’
이름 하나가 이윤의 뇌리를 스쳤다. 이결. 편전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던, 왕 후보자. 이윤은 비로소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이 누구인지 똑똑이 알았다. 그는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대신 문을 잠갔다.
같은 시각, 대비전. 민 대비는 상선과 내금위장에게서 보고를 받고 있었다. 김 씨의 자결 소식, 그리고 이윤 쪽 반응까지.
“이윤이 가만있다고?”
“예, 마마. 아직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사옵니다.”
민 대비는 잠시 침묵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염주를 한 알씩 굴렸다. 그녀는 곧바로 이결을 떠올렸다. 자신이 내린 명, 그리고 그가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나는 말했다.”
대비는 낮게 말했다.
“이윤을 치라고는 했어도, 그 여인을 건드리고 한 적은 없었다.”
상선과 내금위장은 고개를 숙였다. 대비는 일어나 창밖을 내다봤다. 해가 중천에 걸렸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 미소에는 흡족함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민 대비는 생각했다. 이결은 이제 자신이 완전히 쥘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저 아이가, 스스로 선택했구나.”
그 선택은 누군가를 죽였고, 누군가는 살아남았으며, 모두를 바꿔놓았다.
*
대비전 뒤편, 작은 별채에 흰 천을 덮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낮잠을 자는 듯 평온했다. 그러나 그녀를 에워싼 공기는 비릿한 죽음의 냄새로 가득했다. 상선과 나인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달려온 왕은 문턱 앞에 멈춰 섰다.
“어머니!”
작은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대답은 없었다. 사월의 눈이 크게 일렁였다. 눈물이 차오르기도 전, 심장 언저리가 얼어붙는 감각이 먼저 전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허 내관을 통해 받은 서찰에 ‘저는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던 어머니가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있는 모습은 도저히 실감할 수 없었다.
왕은 뒷걸음질 쳤다. 그때, 별채 그림자 끝에 서 있는 대비의 시선과 마주쳤다. 대비는 아무런 기색 하나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왕은 깨달았다. 이곳은 슬퍼하는 곳이 아니라, 슬픔조차 허락받아야 하는 곳임을. 왕의 어깨가 떨림을 멈췄다.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목을, 왕은 스스로 눌러 삼켰다.
“상선.”
왕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까지 울먹이던 어린애 목소리가 아니었다. 쇳소리가 섞인, 낮고 서늘한 명령이었다.
“어머니를 뫼셔라. 그리고…아무도 울지 마라.”
왕은 고개를 돌려 대비를 똑바로 올려봤다. 겁에 질린 토끼 같던 눈망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깊이를 알 수 없는 차가운 심연이 들어앉아 있었다.
대비 입가에 찰나의 흥미로운 미소가 스쳤다. 왕은 이제 알았다. 왕은 그날 이후, 누군가 자신을 지켜줄 수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 궐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왕이라는 ‘괴물’이 되는 것뿐임을. 그날, 일곱 살 윤사월은 죽었고, 이름뿐인 군주가 마침내 눈을 떴다.
*
풍악 소리가 커질수록 왕의 면류관은 무겁게 어깨를 눌러왔다. 겨우 일곱, 제 몸집보다 몇 배는 큰 대례복에 파묻힌 왕의 눈앞으로 활옷을 입은 여인이 걸어왔다. 이현이었다. 열일곱의 그녀는 이미 완연한 여인의 기색을 띠고 있었다. 왕의 정수리가 겨우 그녀의 가슴팍에 닿을 정도였다. 화려한 적의(翟衣)를 입은 이현이 허리를 숙여 왕에게 예를 갖출 때, 왕은 그녀가 죽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담장 위에서 이 장면을 내려다보던 이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붉은 옷을 입은 여인과 아이. 그 기괴한 불균형은 민 대비가 완성한 권력의 자화상이었다. 이결은 손바닥에 남은 화상 자국을 만지작거렸다. 저 장성한 처자가 어린 왕의 손을 잡고 걸어가야 할 길은, 필시 피로 얼룩진 가시밭길이 될 터였다. 이결은 자신의 흉터 남은 손이 그 길을 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많이 닮았습니다.”
촛불이 파르르 떨렸다. 왕의 첫 마디에 이현은 예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췄다. 일곱 살 아이 입에서 나올 법한 응석이 아니었다. 왕의 목소리는 건조했으며, 그 안에 담긴 온기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이현은 고개를 들어 마주 보고 앉은 어린 지아비를 보았다. 면류관을 벗어 던진 왕의 이마에는 무거운 금속이 남긴 자국이 선명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소첩이 감히 그분을 대신할 순 없으나….”
“대신하라는 뜻은 아니예요.”
왕이 말을 잘랐다. 그는 제 몸보다 큰 보료 위에 정좌한 채 이제 막 부인이 된 이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는 방금 어머니를 잃은 아이의 슬픔 대신, 짐승의 갈증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이 궐에서 내가 믿었던 유일한 얼굴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얼굴을 한 여인이 내 앞에 나타났군요. 이것이 대비마마의 자비인지, 아니면 더 잔인한 계략인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이현은 숨을 들이켰다. 왕은 이미 아는 듯했다. 자신이 이 방에 밀어 넣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피가 뿌려졌는지, 그리고 이 혼례가 서로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라는 걸. 이현은 다가가 왕의 작은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제 아비는 전하를 이용해 권력을 쥐려 하십니다. 그리고 대비마마는 저를 통해 전하를 가두려 하시지요. 저 역시 그분들 손에 들린 노리개에 불과합니다.”
이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공포가 아니라, 진실을 내뱉는 자의 전율이었다.
“닮았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어머니로서, 혹은 동지로서 약조하겠나이다. 전하께서 이 궐에서 홀로 피 흘리게 두지 않겠습니다. 설령 제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가문을 등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왕은 이현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장성한 여인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움켜쥐듯 꽉 잡았다. 그것은 부부의 연이라기보다, 벼랑 끝에서 서로의 옷자락을 붙든 생존자들의 결속과 같았다.
“궐 안의 사람들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아요. 하지만 난 다 봤어요. 어머니가 어떻게 됐는지, 중전의 아버지가 왜 나한테 머리를 조아리는지. 우리는 서로 죽여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맞죠?”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우리, 같이 죽는 척해요. 그래야 저들이 먼저 죽을 테니까. 그다음에 우리끼리 진짜로 살아남아요. 알겠죠?”
왕의 말에 이현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열일곱 여인이 일곱 살 왕에게 무릎을 꿇으며, 드디어 이 궐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전하가 침묵해야 할 때는 제가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전하가 흔들릴 때는, 제가 먼저 서 있겠습니다.”
왕은 배시시 웃으며 중전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중전은 어미가 어린애를 재우듯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제 어머니도 어릴 적 저를 이렇게 재우곤 했습니다.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입니다.”
중전은 왕이 잠든 걸 확인하고, 신방 촛불을 껐다. 내관들은 촛불이 꺼진 걸 확인한 다음 물러갔다.
아침 문안은 늘 같은 시각에 이루어졌지만, 그날의 대비전 공기는 달랐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왕은 걸음을 한 박자 늦췄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알 수 없는 공기가 먼저 와 닿았다. 눅눅하지도 차갑지도 않은데, 숨이 걸리는 느낌이었다. 왕과 중전은 나란히 섰다.
일곱 살 왕의 손은 중전의 소매 안쪽에 살짝 숨겨져 있었다. 이현은 왕의 손을 꼭 잡지 않았다. 놓치지 않을 만큼만, 그러나 의지하지 않을 만큼만 쥐고 있었다.
“대비 마마, 문후 여쭈옵니다.”
왕의 목소리는 정확했지만 힘이 없었다. 그 옆에서 중전이 허리를 숙였다.
“중전 이현, 삼가 문안 드립니다.”
민 대비는 자리에 앉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웃지 않았다. 웃음은 상대와 필요에 따라서만 쓰는 것이었다.
“아침은 드셨습니까?”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전은요?”
이현은 미리 준비한 표정을 꺼냈다. 눈꼬리를 조금 올리고, 입꼬리를 아주 천천히 당겼다. 훈련된 웃음이었다. 궐에 들어온 뒤 가장 먼저 배운 얼굴이기도 했다.
“덕분에 잘 들었습니다.”
민 대비는 그제야 웃었다. 다만 입술만 움직인 웃음이었다.
“궐이 중전에게 맞나 봅니다, 얼굴에 화색이 돕니다.”
칭찬처럼 들렸지만, 온기는 없었다. 이현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전하께서 편히 해주셔서 그렇습니다.”
왕은 그 말이 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대비의 시선이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머리에서 쥐가 나고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민 대비는 손짓으로 둘을 가까이 오도록 했다.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서자, 대비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찻잔이 내려오는 동안에도 시선은 중전에게 박혀 있었다.
“중전.”
“예, 마마.”
“첫날 밤은 어떠셨습니까?”
이현은 잠시 망설이는 척했다. 실제로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 전하께서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곁을 지켰습니다.”
왕의 손가락이 소매 안에서 움찔했다. 이현은 그 움직임을 봤지만,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래야지.”
민 대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왕은 잠을 잘 자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가 흔들리지 않거든요.”
그 말에 왕은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대신 이현이 나섰다.
“명심하겠습니다.”
민 대비는 옆에 놓인 작은 함지를 열었다. 안에는 종이뭉치가 가지런히 묶여 있었고, 끈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중전, 이게 뭔지 아십니까?”
이현은 대비가 들어 보인 종이뭉치를 바라봤다. 글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종이의 두께와 결이 눈에 익었다. 가슴속 어딘가가 철렁 내려앉았다.
“잘…모르겠습니다.”
민 대비는 종이뭉치를 손으로 가볍게 눌렀다. 마치 살아 있는 작은 동물을 진정시키듯.
“문안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그 말이 떨어지자 대비전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왕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현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문안이란 참 편리합니다. 누굴 향한 것인지, 어디까지가 인사인지 애매하거든.”
민 대비는 종이뭉치를 다시 함지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방 안에서는 또렷했다.
“중전이 참 성실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과찬의 말씀이옵니다.”
이현은 고개를 숙였다.
“다만.”
민 대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성실한 사람일수록, 기록할 게 많아지기 마련이죠.”
이현은 고개를 들어 대비를 바라봤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것이 첫 번째 ‘가짜 웃음’ 뒤에 숨긴, 아주 작은 선택이었다.
“제가 배워야 할 것이 많아 그런 듯합니다.”
민 대비는 그 시선을 잠시 받아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이번에는 눈까지 움직였다.
“그래. 배운다는 건 좋은 일이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왕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손에 땀이 차는 것만 느꼈다.
“이제 일어나 보시죠.”
민 대비가 말했다.
“왕도 중전도, 아직 아침이 길 테니.”
“예, 대비마마.”
왕과 중전은 동시에 대답했다. 돌아 나서기 전, 민 대비가 이현을 불렀다.
“중전.”
이현이 대비를 향해 돌아섰다.
“웃는 건 좋은 겁니다.”
민 대비는 말을 멈췄다가, 아주 부드럽게 이어 덧붙였다.
“허나 내 앞에서는, 너무 오래 웃지 마세요.”
이현은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짧게.
“명심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대비전을 나서자, 문이 닫혔다. 왕은 그제야 허리를 숙이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현은 왕의 손을 꼭 잡았다. 가짜 웃음은 끝났지만, 연극은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