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수 없어 조화만 보냈습니다. 문자메시지도 보냈습니다. “코로나가 뭔지, 저승길 배웅도 가로막네요. 애도합니다. 절도 못 올려 죄송합니다.”
2년 전, 제 아버지께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추석 명절을 목전에 두고 길을 건너다 사고를 당하셨는데요. 그 자리에서 운명하셨습니다. 너무나 애통하고 황망했습니다. 지병이 있었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예기치 않은 상황에 어쩔 줄 몰랐습니다.
차례를 지내야 하니 누가 조문이나 오겠습니까. 가족들과 상의 끝에 장례 일정을 조정했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도 외로웠는데, 가는 길마저 외롭게 해 드릴 순 없었기 때문입니다. 명절 당일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제 가슴 한쪽에는 여전히 아쉬움과 애절함이 응어리져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저 길. 어떻게 건너가야 할까요?
이틀 연속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1000명을 넘었습니다. 서울은 하루에만 400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왔습니다. 국회 기자실에서 있노라면 확진자 안내 문자가 여기저기서 옵니다.
금천구청에서도, 동작구청에서도, 강동구청에서도 옵니다. 천안에 있을 때 오는 것과는 횟수와 규모 면에서 차원이 다릅니다. 많게는 열 명 넘게 발생했다는 메시지를 받으면 겁이 날 정도입니다.
하루 사망자도 처음으로 20명 넘게 나와 방역 당국에 비상이 걸렸다는데요. 확진자는 이름 대신 번호로 매겨지고, 사망자는 숫자로 표시하는 시대라니. 참담한 노릇입니다.
코로나 상황에 부고도 제대로 띄우지 못하는 시국입니다. 앞서 전해 드린 지인의 경우처럼 가족과 조용히 상을 치르는 것이 새로운 장례 문화로 자리 잡아가는 모습입니다.
코로나로 사망하면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시신은 물론이고, 소지품도 다 태워야 한답니다. 유족들은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에 가족을 잃은 슬픔조차 맘껏 표현하지 못합니다. 고인 역시 가는 길이 외로울 수밖에요.
별안간 사고로 숨졌는데 배웅하는 사람들마저 없다면, 그 길은 얼마나 서럽고, 외롭고, 황량할까요. 그러고 보면 제 아버지는 가는 길이 그들만큼 외롭진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외롭지 않을 권리’는 산 사람한테나 해당한다는 걸 절감하는 요즘입니다.
예식은 미뤘다가 해도 되지만, 장례는 미룰 수 없으니까요. 죽은 이는 외롭지 않게 떠날 권리도 제한적입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다시 한번 지인 모친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당신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말고 힘내세요. 정말 힘들 땐, “힘내”라는 말보다 “괜찮아”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법이죠. 그런 의미에서 동경소녀의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 준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