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미로 Jun 06. 2023

맘만 바쁜 손자 돌잔치

눈을 번쩍 뜨고서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 너무 이르다. 다시 잠을 청하지만 나이 탓인지 쉬이 잠들지 못해서 비몽사몽인 걸 표시 내듯이 주춤주춤 몸을 세워 피시를 켠다. 다음 주에 있을 학회 참가 계획서를 작성하는데 금세 졸린다. 역시 일과 독서는 중독으로 둔감해지지 않는 수면제 효과가 있다. 다시 잠든 시간이 세 시 정도였는데 또 번쩍 눈을 뜨고 시계를 확인하니 다섯 시네... 피시가 켜져 있는 걸 보고 주섬주섬 기억을 챙겨, 끊어진 두 시간을 꿰어 계획서 작성을 이어간다. 보통은 아침을 챙길 시간인데, 아내도 몸이 안 좋은지  이불을 폈다가 오므렸다가 하면서 한 평도 안 되는 침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설레며 잠 못 드는 이유는 둘째 손자 돌잔치 날이기 때문이다.


첫 손자 돌은 코로나 상황이라 아들 내외 세 식구만 단출하게 보냈다. 아직도 코로나를 조심하고 있지만 둘째 손자 돌잔치는 사돈네와 함께 잔칫상을 차리기로 했다. 새벽 다섯 시 근처에 선잠 자는 듯한 아내를 살피는 마음으로 피곤함도 달랠 겸 곁에 잠깐 누웠다. 언제 눈이 감겼는지 모르는데... 이크! 눈떠보니 출발 시간을 훌쩍 넘겼다. 부랴부랴 면도하고 샤워하고 머리를 말리는데, 얼마나 오랜 세월 거울을 들여다보며 화장했는지 이젠 엄청나게 친해진 얼굴이 거울 속에서 마주하고 있다. 아는 체도 못 하고 서둘러 거뭇거뭇한 수염이랑 버짐 핀 듯이 들뜬 각질을 정리하고 옷을 챙겨 입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몇 벌 안 되는 웃옷과 바지 그리고 재킷을 맞춰보는데 조합이 이렇게 많은 경우의 수를 만들어 내는지 생각 못 했다. 밝은색 드레스셔츠에 바지 두 번 갈아입고, 재킷 두 번 맞춰보고, 어두운 스트라이프 드레스셔츠에 똑같이 반복하니 집안이 온통 먼지 구덩이가 된 거 같고, 서둘러 입었다 벗었다 하며 진땀 뺀 탓에 샤워한 상쾌함은 없어진 지 오래다. 결국 멋지진 않지만, 정갈히 차려입었다고 위로하며 집을 나선다.

옷에 특별히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사돈 내외와 처음 만나는 상견례 자리에서 무안했던 기억을 지우지 못한 탓이다. 며느리를 통해서 젊은 부모들답게 편한 복장으로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우리는 상견례 후에 낚시나 산행을 갈 예정이라서 격식 없는 복장으로 가겠다고 어려운 자리인 만큼 조심스레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사돈 내외는 정장으로 갖춰 입고 나왔고, 우리는 등산복 차림이라 몸 둘 바를 모르며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니 "딸 가진 부모는 다 그렇다"라고 하여 두 번 죽임을 당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쭈뼛쭈뼛 선다.

투덜투덜하며 바쁘게 보낸 아침인데 입가에 미소는 사라지지 않고, 자꾸 떠오르는 손자의 초승달 닮은 눈웃음과 무덤덤하게 다가오다 앞니 두 개 드러내며 웃어주는 둘째 손자 생각에 마음은 벌써 돌잔치 상 앞에 있다. 서둘러 운전하며 가는 길에 계속 만나는 과속 카메라를 원망하고, 줄지어 선 차들을 밀어붙이고 싶은 맘을 달래느라 심호흡하는데, 아들이 전화해서 어디쯤이냐고 재촉한다. 마음이 들떠 너무 일찍 준비하다가 결국 이렇게 손주 돌잔치에 늦었다. 평소 친가 처가 따지지 않고 한 가족으로 지내는 맘과는 반대로 아들 둔 게 벼슬인 양 맨 뒤에 나타난 꼴이 되었다. 이번에도 실례를 범하여 죄송한 마음에 고개 들고 인사 나누기조차 부끄럽다. 이미 한차례 식사를 마친 사돈이 음식부터 가져오라고 권하는데, 맛난 뷔페 음식을 고르지도 못하고 가까운데 꺼 몇 가지 갖다 놓고 눈칫밥 먹으며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인사를 나눴다.

이제 정신 차리고 주인공 재롱을 보는데 첫 손자가 낯을 가리며 기분이 안 좋다고 울먹이고 있어서 양팔을 내밀었더니 내 품에 쏙 안긴다. 친한 할아버지가 된 기분에 으쓱하며 기분 전환해 주러 안고 밖으로 나왔다. 차 구경하다가 감자튀김을 사달래서 가게를 찾는데, 예전에 그 많던 롯데리아가 다 어디 갔는지 한 시간을 찾아 헤매어도 보이질 않는다. 피자 가게나 치킨집에 들어가 감자튀김 없느냐고 물으니 외계인 취급이다. 결국 고층 아파트에 싸여 길도 잃어 헤매다가 빈손으로 어찌어찌 되돌아왔더니, 방 대여 시간 끝났다고 얼른 사진이나 한 장 찍고 가잔다.


회사 앞에 술집은 어디가 좋은지 빤히 알고 있어서, 분위기 낼 때는 깔끔하게 차려 나오는 참치 집을 추천하고, 왁자지껄 떠들고 놀려면 인심 좋은 삼겹살집으로 가자고 나서는 사람인데, 그 많던 롯데리아가 피자집이나 카페로 바뀐 건 모른 탓에 첫 손자 비위 맞춰 감자튀김 파는 집 찾느라 밖에서 시간을 다 보냈다. 정작 둘째 손자 돌잔치에는 같이 참가하지 못하고 코빼기만 잠시 보인 격이 되었다.

코로나로 한동안 뵙지 못한 사돈 내외와도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누고, 가족사진에도 몇 장밖에 끼지 못했다. 나중에 둘째 손자한테 관심 없는 할아버지로 책망받을게 걱정이다. 내가 잘 보이는 사진을 골라 전문가에게 맡겨서라도 멋지게 꾸며서 액자로 남겨 입방아에 아예 안 오르게끔 해봐야겠다. 돌잔치 추억을 내 얼굴에 팔자 주름으로 새겨놓을 심산인 양 여전히 입가에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퇴직을 만나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