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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미로 Jun 10. 2023

반갑다. 퇴직!

서두르지 않으면 대책이 보인다.

머릿속은 아직 정신없이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은 일찍이 찾아와 쌀쌀한 늦봄을 알리려는 듯 눈꺼풀을 감싸고 환한 아침을 알려온다. 몇 달 전만 해도 벌떡 일어났으련만 이젠 일부러라도 햇살과 밀당을 한다. 돌아누워 보기도 하고 이불을 덮어써 보기도 하며 이 밤을 늘어뜨리는 이유는 퇴직해서 바쁜 일상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긴장과 걱정으로 저절로 벌떡 일어나서 어디 나가지는 않지만, 책상에 앉아 컴퓨터나 핸드폰, 책을 만지작거리거나 혹은 거실에서 빈손 운동 등을 닥치는 대로 했다. 광고 일색의 메일도 들여다보고 일부러 자동차 관련 뉴스를 찾아보기도 하고, 아무 책이나 뒤적거리고 게다가 이른 시간에 커피를 타서 들이마시는 통에 뱃속을 놀라게도 했다. 그러다 지쳐 아침을 맞이하고 아내가 맛깔스레 차려준 밥을 먹어 기운 차려 보지만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마음은 '잊고 싶다.' '눕고 싶다.'만 떠올리고 있다.

놀면 죄짓는 듯한 마음에 쫓겨 몇 달 그렇게 지내다 보니 아침 일상이 되었고, '이렇게 지내면 안 될 거 같은데....' 하며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그런데 쫓기는 마음만 없다면 지금 일어나서 하는 일련의 행동이 괜찮아 보인다. 먼저 자동차 관련 뉴스나 기술 소개와 같은 걸 찾아보고, 다음으로 책도 몇 페이지 들춰보다가 화상영어 시간이 되면 늘 부족하게 느끼는 영어 공부를 하는 좋은 루틴이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세월을 허송하지 않고 뭔가 해야만 한다'는 강박증세로 생각하는 게 문제고, 조바심이 몸과 마음에 주는 스트레스가 있어서 이것만 가려내면 좋겠다.

매일 아침 바쁘게 일어나 오늘 할 일을 머릿속에 가득 담고 집을 나서는 습관을 퇴직했다고 전등 껐다 켜듯이 하루아침에 느긋이 일어나 아침을 즐기는 삶으로 바꿀 수 있겠는가? 퇴직 직전까지 동료들과 그렸던 미래가 머릿속에 가득하고, 오늘은 어떤 연구원이 만들어 낸 사건이 찾아올까 기대하고, 여러 프로젝트에서 발생하는 이슈들을 떠올리며 어떻게 풀어나갈까 고민하고 미리 예방하고자 아이디어를 논하고 또 내외부 고객들과 나누는 소통 활동에 묻혀 지내는 일상에 길들어 반사적으로 행동할 정도로 기나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퇴직한 다음 날부터 꼭 해야 할 일은 양치질이나 세끼 챙겨 먹는 거 그리고 아내가 시키는 일 정도다. 갑작스레 맞닥뜨린 아일랜드 모허의 절벽 같은 단절, 이 커다란 차이를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얼른 기존의 습관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다시 만들려고 애쓰고, 바뀐 환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관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내 자신이 보인다. 마침 유튜브에 최경영의 이슈오도독에서 "50대 조기 은퇴자의 행복한 은퇴법"을 소개받아서 듣고 보니 콘텐츠를 수용하는 사람과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사건을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단다. 수용하는 전자는 부정적이고 만들어 내는 후자는 긍정적이란다. 지금 고민하는 내용과 통하는 얘기라서 마음이 훅 당겨 끝까지 한마디 한마디 따라가며 손으로 무릎도 치고 표정을 웃었다 놀랐다 해서 맞장구 쳐가며 봤다.

지속할 수 있는 저렴한 취미를 만들라는 것과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쓰라고 추천해 주는 것이 별생각 없이 내가 만들어 가는 일상과 우연하게도 딱 맞다. 다들 퇴직 전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겪어보니 회사 다닐 때는 회사 일에 집중하기 때문에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갑작스레 맞닥뜨린 현실을 직시하고, 꼬인 실타래 풀듯이 한올 한올 끝자락을 잡아당겨 보기도 하고 뭉친 곳에 바늘을 찔러 틈을 만들어 다른 쪽을 끄집어내 보기도 하여 풀듯이 어쨌든 공들이고 시간 들여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90년 후반에 들이닥친 IMF나 최근의 코로나 사태처럼 전례가 없고, 예상치 못한 사건이 아니라서 선례도 찾아봐 가며 차근차근 대처해 나갈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이른 봄 산기슭에 햇살이 닿는 곳마다 쪼금 쪼금 눈 녹아 없어지듯이 쉬면서 천천히 정신적 충격을 누그러뜨려야 하고, 정신 차리고 나야 새롭게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대학 4년 다녀서 전공이란 이름 달고 30년 이상 잘 살지 않았는가? 이젠 구력이 있으니까 다시 4년 투자하지 않고 1년이나 2년만 준비해도 이제껏 살아온 전공의 연장선이 아니라 새로운 전공 즉 신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30년을 잘 살아갈 수 있을 자신감이 불뚝 솓는다.. 오늘 아침 햇살은 바늘 뿌려대듯이 쏟아 들어오지 않고, 딱딱한 방안 벽과 벽장을 누런 황금빛 들녘같이 색칠하며 선잠 깬 나를 포근히 감싸주고 있다.

이번 달에도 직장동료와 선후배를 만날 약속으로 구글 캘린더를 꽉 채워놓고 재래시장 좌판 둘러보듯이 지나온 시간의 정리와 앞서가는 선배들의 얘기에 귀 기울여 골라 먹는 즐거움을 만끽하겠다며 입가에 팔자 주름을 그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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