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속 생존기
2년 전 유튜브 신사임당 채널에 '남편이 퇴직했다'는 박경옥 님의 이야기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대기업 해외 법인장까지 했던 남편분께서 퇴직하고 택배 상하차를 하신다는 사연이었다. 퇴직 전 삶이 퇴직 후에도 이어질 거라 착각한 것과 퇴직 후 수입 절벽에도 소비규모를 줄이지 않은 것이 큰 실수라고 한다.
무소속 자영업자의 삶은 "수입의 변동폭" 저점보다 낮게 살아가야 한다. 다시 말해, 비용을 줄여야 한다. 비용을 줄여 생활 규모를 작게 가져갈수록, 파이어 목표금액, 파이어 달성 시기, 파이어 이후의 생활 안정성(자산시장 변동성 방어)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최대한 간소한 삶을 유지하고 우리 가족의 상황에 맞게 조정해나가고 있다.
바보들은 항상 노력하지만, 똑똑한 사람들은 환경을 바꾼다.
-최고의 변화들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사람의 의지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한다. 한정된 의지력을 갉아먹으며 노력하는 것보다 환경과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살면서 덜 애쓰게 되는 것 같아, 항상 마음에 두고 있는 말이다. 단순히 덜 소비하고, 덜 소유하려는 일련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간소할 수밖에 없는 생활환경(시스템)을 갖춘다면 나의 의지력을 아낄 수 있기 때문에 바라는 목표를 잘 그리고 오랜 기간 유지해나갈 수 있다.
우리 집 냉장고는 320리터이다.
결혼할 때 구입한 대형 양문형 냉장고를 수리하기 위해, 안에 있던 음식들을 전부 꺼낸 적이 있다. 전부 꺼내놓고 보니 저장된 양에 대비해 냉장고에서 실제로 먹고 있거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생각보다 적었다. 심지어 몇 년 전의 음식마저 동결건조되어 냉동칸 구석에서 출토(?)되었다. 가용 부피보다 실사용 부피는 절반 이하여서 굳이 큰 냉장고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양문형 냉장고를 수리 후 중고 처분하고, 상 냉장 하 냉동 방식의 320리터 냉장고를 인터넷 최저가로 60여만 원을 주고 신품 구입하였다. 냉장고는 작아졌지만, 불필요하게 저장하지 않기 때문에 신선한 음식을 제때 먹고 있다. (요즘은 쿠팡 프레쉬 덕분에 더욱) 그리고 작은 냉장고는 재고 파악이 용이해서 중복구매를 막는 효과도 느꼈다. 쟁여두는 습관이 사라지니 오히려 여유 공간은 양문형 때보다도 더 넓어진 느낌이다. 이틀 치 장보기 저장은 무리가 없고, 급히 필요한 것은 동네 마트로 걸어가면 되니, 공짜 운동도 되고 1석 2조다. 조금만 부지런해지면 된다.
10분 거리 안에 있는 대형마트에 거의 가지 않는다. 이제는 다량 구매를 할 수도 없거니와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가더라도 필요한 물건만 살 수 있게 장바구니나 카트 없이 다닌다. 작은 냉장고로도 충분히 불편함 없이 적응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미래의 냉장고 교체시기에 다시 작고 저렴한 냉장고를 살 수 있다. 다시 저렴한 냉장고를 사도 된다는 것은 파이어 이후의 삶에서도 한 번에 목돈이 나가는 변수를 줄일 수 있다. 아마도 다음 교체시기에는 이것보다 더 작은 냉장고를 살 것 같다.
돈을 쥐고 있고 아직 동네 마트에서 사 오지 않았다면, 내 음식을 마트에서 마트의 비용으로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돈의 역할"이 아닌가 싶다. 외식이 거의 없던 어렸을 적도 이보다도 더 작은 냉장고로 4인 가족이 밥을 해먹고 살았던 기억도 있다.
마찬가지로 세탁기도 작은 사이즈를 사용하고 있다.
신혼 때 아마도 당시 최대 사이즈였던 14키로 세탁기가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기사랑 세탁기를 따로 쓰긴 했지만, 아기에서 어린이로 컸을 때, 우리 부부의 옷을 빨 때에도 아기사랑 세탁기 사용 빈도가 늘면서 큰 세탁기가 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큰 세탁기를 사용하면 좋은 점은 한 번에 많은 양을 빨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특히 여름에 땀냄새가 밴 옷이 세탁기 최대 세탁 부피가 될 때까지 묵혔다가 빠는 경우에는 옷도 상하고 악취도 생기고 옷에 냄새가 배기도 한다. 세탁기에 가져다 넣고 세제 넣고 작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세탁 후 꺼내는 것까지 합쳐도 1분이면 충분하다. 사실 점퍼 같은 큰 빨래는 자주 빨 일이 없고, 나눠 빨면 된다. 그것도 일 년에 몇 차례 정도다.
세탁기도 9키로짜리가 있었지만 9키로는 주로 빌트인 제품이 많았다. 빌트인이 아닌 제품을 구하기 어려워서 10키로로 구입했다. 이것으로도 얇은 이불을 충분히 빨 수 있고, 두꺼운 겨울 이불은 건조기(9키로)로 수시로 침구털기를 하고 빨아야 할 때에는 가까운 빨래방에서 빨고 있다. 이것 역시 고장 났을 때 재구입 비용은 적을 것 같다.
작은 사이즈이지만, 본연의 기능 활용에 문제없는 제품들이고, 무엇보다 미래의 재구입 비용의 절감이 가장 큰 목적이다. 다행히 잘 쓰고 있고, 참고 쓴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이외의 물건들도 필요한 갯수의 생활 필수템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편이다.
최근 이사할 때도 이삿짐이 얼마 없어서, 기본금액으로 이사했다. 이삿짐 탑차는 1/3의 공간이 남았고, 특히 주방 정리해주시던 이삿짐센터 여직원의 새어 나오는 미소를 잊지 못하겠다. 와이프와 농담으로 나중에는 SUV 한대로 이사 다닐 규모를 만들자고 웃곤 한다.
파이어 이후에는 정해진 예산으로 살아가야 해서 하고 싶은 일에 예산 비율을 높이고자 줄일 수 있는 부분은 줄이려고 한다. 그리고 비용은 물론이며, 환경이나 시스템을 바꾸는 방법을 꾀한다. 절약된 비용은 미래의 생활비가 될 것이며,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취미에 더 많은 금액이 배정될 것이다. 박경옥 님의 사연처럼 갑작스러운 비용 컷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 연착륙하기 위해 미리 적응을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