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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연 Apr 21. 2019

마크 로스코 케이크

 

   요즘 국내에서 유행하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디자인의 디저트와 케이크들. 입소문보다는, 끊임없이 스크롤하다 멈칫하게 하는 비주얼들은, 일단 먼저 사람을 자극하고 소비를 조장하는 요즘식 '소문' 내기 방식의 시작이자 당연한 산물이다.

 디저트 한 개를 팔기 위해 우선 감탄사가 나오는 겉모양이 있다면 반은 할 일 했다. 일단 예쁘면 눈이 가고 기분이 좋아지면서 사진 속의 음식에 근거 없는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 뒤, 나 자신의 행복과 연결시켜본다. 먹어보지 않은, 맛을 모르는 음식에 대한 식욕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내가 저것을 경험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컨텐츠를 만들어야 하고) 사람들이 내가 이것을 향유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나의 피드를 장식하겠다)'는 심리가 생겨난다는 것이 맞겠다.


 아름다운 디저트는 어떤 것을 의미하나? 디저트는 인류에게 필수적 요소가 아니며, 생존하여 살아가는 것 이상의 수준의 삶을 살게 되면서 사람이 자연스럽게 자신에 주게된 부수적 기쁨이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이 대부분은 우리의 삶과는 직접적 연관성이 없고 필요도 없듯이, 디저트도 필요성이 있는 요소이기보다는 부수적 기쁨이나 사치와 더 가깝다. 그래서 시간을 더 들여 조금 더 아름다워지고 완벽해지지 않았을까.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케이크 데코레이션과 하이엔드 디저트 시장을 가만히 구경하다 보면, 매끈하고 완벽한 표면의 숨 막히는 모양의 디저트들부터, 키치하고 지저분한 감성의 버터크림 케이크들 까지 인스타그램이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시점부터 비주얼 디저트 세상은 폭발하듯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맛과 향을 공유할 수가 없는 온라인에서, 우선 보기 좋으면 전문성이 있어 보이고 따라서 맛이 있지도 않을까? 생각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망을 여러 번 했다. 그 정도로 비주얼이 좋은 수준이 되려고 시간을 투자하는 사이에 맛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하지 않더라. 우선 그들이 이 프로페션을 선택한 것의 시작이 데코와 외형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지 때문일 수도 있고, 시장이 그것을 원해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겠다.

 나라고 다를 바 없다. 레이어 케이크를 몇 번 만들어 보면서 여유가 생기고, 티끌 하나 없는 아이싱과 컬러감, 귀여운 파이핑 같은 케이크 데코 기술에 욕심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내 인스타그램 피드의, 케이크 레이어를 쌓고 아이싱하는 것을 빨리 감기로 편집한 영상들을 보면 나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연습 없이 잘할 수는 없지만, 나의 24시간을 케이크 데코레이션에 쓸 수 있는 사람도 아니므로, 케이크 연습을 하는 시간들은 굉장히 소중하고 한번을 해도 잘하고 싶다. 기왕이면 조금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을 만들고자 한다. 시트도 잘 만들고 싶고 아이싱도 잘 해서 기왕에 만들 케이크, 예쁘게 만들고 싶다. 미래에 경험이 쌓이면 이 조급한 마음도 조금은 안정이 될까?


 하도 케이크만 보고 디저트 구경만 하다 보니 따라 할 것만 보이고 내가 할 것이 보이지 않아서, 하루는, 그냥 순수하게 그림들을 보기로 했다. 디자인 학생일 때 프로젝트를 준비하다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을 때! 썼던 방법이다.

  

Mark Rothko <White Center (Yellow, Pink and Lavender on Rose)> 1950


 

 마크 로스코의 1905년작 White Center (하얀 중심부)이다. 나의 케이크 브레인은 이 그림을 케이크 레이어로 인지했고 케이크 만들 계획을 세우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사이즈에 맞는 각 컬러의 레이어를 굽고 얇은 선 디테일은 레이어 아이싱, 잘랐을 때 테두리 디테일이 살아나도록 표면 아이싱은 이렇게... 케이크를 구울 날이 그렇게도 기다려졌던 적은 없었다. 나는 버터크림을 좋아하지 않지만 다들 버터크림을 쓰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해서 이번에 한번 익혀보기로 했다. 케이크 시트는 색소를 입히기 좋은 옐로 케이크로!


 레이어는 세 가지이다. 오렌지에 가까운 옐로 화이트, 진한 핑크. 검정 라인은 선이니까 굳이 케이크가 아니라 아이싱 레이어를 하면 되겠고.. , 크럼 코트 (crumb coat)*는 레드로 해서 단면에서 테두리처럼 보이도록 하고... 마지막 겉 아이싱은 캔버스 컬러로 해서 로스코가 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마주했을 빈 캔버스를 표현해볼까 하는 온몸의 털이 쭈뼛대는 부끄러운 생각도 해보았다. 로스코의 그림이 어디에 소장되어있나 찾아보다가 한쪽 구석의 작은 썸네일로 찾은 그림이 있었다. 로스코 그림에서 화이트가 바탕이 되는 것은 잘 없다고 생각해오다가 보니 굉장히 새롭고 신선했다.

 * Crumb coat: 아이싱을 하기 전에 케이크 시트 표면에 얇게 아이싱을 펴 바르는 과정. 주로 이 표면을 바르고 15분 정도 냉장을 하는데, 이 과정을 거치면 아이싱을 할 때 케이크 부스러기가 아이싱의 섞여 올라오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Stella Parks에 의하면 이 crumb coat를 해놓으면 시트를 랩으로 싸는 것보다 효과적으로 시트의 촉촉함을 보호할 수가 있다고 한다. 로스코의 그림에서 보이는 레드의 바탕색은 이 크럼 코트를 이용해 표현했다.


Mark Rothko, Untitled, 1950 Image copyright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케이크를 만드는 과정은 주로 저녁때 케이크 시트를 굽는 것으로 시작하고, 식힌 후, 오전 중에 아이싱을 만들고 케이크를 조립한 후, 아이싱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이 케이크에서 중요한 것은 솔직히 말해, 맛이 아니라, 자른 단면이 얼마나 그림과 비슷하게 보이느냐 였다. 물론 중요한 것은 각 컬러 블록이 차지하는 비율과 컬러의 정확함(비슷함)이었는데 바로 이 컬러가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케이크 반죽에 색소를 섞어 비슷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구우면서 얼마나 컬러가 변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림에서 한 색이 차지하는 면적의 비율을 반죽 무게에 적용하여 3가지로 나누고, 각각의 색을 만드는 내내 그림을 한 번 더 보고 고개를 갸우뚱해가며(이렇게 하면 판단이 더 잘 설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참 이상하지만) 내 나름의 촉을 믿었다가, 또 멈칫하며 또 섞어보고. 어느 순간에는 멈추고 이제는 구워야 3시간 내에 잘 수 있을기 때문에... 후다닥 오븐에 넣어 구워버린다. 오븐에 들어간 시트가 구워지는 중 설거지를 하며 든 생각이,

'케이크를 다 구워도 다 만들고 잘라보기 전까진 색이 잘 나왔는지도 알 수 없겠구나..' 그렇다면 고생해서 만든 케이크가 생각과 전혀 달라 내일 아침에 아주 절망적일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드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이 핑돈 이유,슬픈 이야기 하나해본다.

 오래전 케이크를 처음 만들기 시작했을 때, 조카에게 케이크를 만들어주려고 연습까지 잘해놓고 정작 본 케이크를 만들 때 시트를 굽는 와중 테이블 위를 정리하다가 키친타월 안에 그대로 가지런히 놓인,쓰이지 않은 달걀들을 발견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었던 기억이났다. 푹 꺼진 케이크를 보면서 또 울고 아이싱을 하면서 또 울고... 어른이 되어서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난 적은 강아지가 죽었을 때 말고는 없었던 것 같다.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가족 누군가의 생일 케이크를 만들 때 크림치즈 아이싱이 수프처럼 줄줄 흐르고 냉장고에서도 굳지를 않아 스패출러로 흘러내리는 아이싱을 연신 걷어 올리는 소용없는 짓을 하며, 또 구슬프게 울었다. 이런 나를 보는 남자 친구는 위로를 하면서도 속으로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럴 때면 아무리 내가 실수를 했어도 레시피가 원망스럽고 누군가를 탓하고 싶고 서럽고 피곤해서 더 슬프다. 혼자 케이크를 만드는 일은 때론 굉장히 외롭고 피곤하다. 가장 힘든 것은 누군가를 위해 만드는 케이크가 실패했다고 느꼈을 때다.  

슬픈 이야기 끝.






 늦은 밤 시트가 다 식기를 기다렸다가 잘 싸서 냉장하고 피곤함에 쓰러져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이탈리안 머랭 버터크림 아이싱을 만들고 가장 먼저 검은색을 만들었다. 레이어를 순서대로 잘 쌓고 레드 crumb coat를 입혀 냉장했다. 진한 레드 crumb coat가 굳고 나서 화이트와 오렌지로 로스코의 그림을 이리저리 흉내 내보았다. 이런 구체적인 디자인이 없는 추상적인 장식을 하다 보면 끝이란 게 없다. 언제든 끝내도 되기 때문이다. 이제 됐다 하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 오랜만에 타오른 아트 정신을 진정시키고 다시 한번 냉장고에서 살짝 굳힌다.

 


케이크를 자르는 순간이 오고 가장 잘 드는 칼로 힘주어 케이크를 잘라 보았다. "아 너무너무 예쁘다!"라고 소리 내어 말하고 (집에 혼자 있었으며 나는 혼잣말을 거의 하지 않는 편임을 감안) 피곤한 나를 위한 함박 미소도 지어 본다.

시작부터 끝까지 망설임이 없었던 케이크 프로젝트 하나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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