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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연 Nov 13. 2019

베이킹, 자기애.

 

그때 왜 나는 조금 더 싸우고 버티지 않았을까?



그때가 오기 한참 전, 나는 내가 한 공부를 정말 좋아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멋지고 초현실적인 옷을 만들고, 아름다운 물건들을 창조하며, 레이 카와쿠보 같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거라 생각했다.  큰 회사에 취직할 수도 있었지만, 내 마음에 맞는 작은 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새로운 곳에서 시간이 지나고, 나는 그때 큰 타협을 했다. 큰 타협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그게 어렵지 않았다. 나는 현실적이고 현명한 선택을 한다고 믿었고,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후 몇년간, 나는 그 선택이 진화해서 만들어진 이상한 삶을 살았다. 나는 회사를 떠나고 싶었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 하다가, 문득 모든 불행은 내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삶을 좋아하지 않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고 있다. 남을 탓하는 것이 훨씬 간단해서 나는 그렇게 행동했고, 일단 남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자 나는 더 깊고 어려운 것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



얼마 전 옷장 정리를 하다가, 희망이 있고 내 삶을 열렬히 사랑했을 때, 나는 내가 큰 맘먹고 산 디자이너 옷을 보았다. 그러자 모든 것이 분명해졌고 나는 분노와 한숨의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읽던 때. 내 머릿속 거북이의 모양을 그려서 내 눈 앞에 그것을 만들어 내고 싶었던 때. 입을 수도 없는 기이하고 커다란 옷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행복했을 때. 지금은 왜? 누구나 그렇게 된다고들 하지만 이건 엄. 청. 나. 게 슬픈 일이다. 유리알 같은 행복이 잘 있나 보려고 주머니를 들여다봤는데 산산조각 깨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 기분.  

 그때 남들의 평가는 내가 하는 일과  상관이 없었고 그저 내가 원하는 걸 하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큰 타협을 하게 된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했던 것처럼.

  잠깐의 어려움도 겪고 싶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이 날 걱정하는 게 싫어, 앞이 보이지 않는 길 대신 순항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너무 순진하고 답이 없다고 믿었던 길을 쉽게 등지기 전에,

"조금 더 싸웠어야 했는데, 왜 그랬지? 왜! 왜! 왜..."

이런 생각들이 나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정신에 사래가 들린 것 같았다. 사래가 들리는 것을 미리 알고 피하기는 어렵다. 해결하려면 크고 요란하게 아픈 기침을 하거나 입을 틀어막고 벌게진 얼굴에 눈물을 짜내며 억지로 진정시켜야 한다. 혼자서. 그러고 나서는 '다음 부터는 조심해서 물 마셔야지' 소용없는 약속.



 베이킹을 하게 된 것이 혹여나 이 부족함 마음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일까 봐 얼마 동안은 어떠것도 만들지도 계획하지도 않았다. 내 지루한 인생에서 잠깐씩의 도피였을까. 더 큰 문제를 직면해야만 하는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계속하던 중, 오랜만에 보는 여러 사람들과 모여 앉아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서로 주고받던 얘기를 가만히 듣던 중에, 누군가 왜 요즘은 쿠키 박스 안 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게 사실 번거롭게 참 힘들다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다른 누가, 내가 준 레시피 덕에 항상 맛있는 쿠키를 먹을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그땐 별 생각이 안 들었고 단지 쿠키 박스를 받으면 사람들이 예상보다 아주 좋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큰 심경의 변화 없이 아무렇지 않게 5가지 디저트가 담긴 쿠키 박스를 계획하고 주말 내내 베이킹을 했다. 양일간 홀로 많은 베이킹을 하는 것은 어렵다. 설거지를 열두 번도 더 해야 하고, 오븐은 너무 작아 하루 종일 돌려도 많은 것을 만들기 어렵다. 불평하는 건 아니지만 현실이 그렇다. 왜 하지? 머릿속에선 논리적인 이유가 떠오르지 않지만 마음 안에는 합당한 확신 같은게 있다. 그래서 밀어붙인다.



 수많은 케익과 페이스트리가 진열된 모습은 나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설렘을 준다. 런던에 살 때, 그리고 다른 유럽의 나라들 갔을 때 볼 수 있었던, 카운터 가득 진열된 크고 작은 페이스트리와 케익들이 있는 카페에 들어설 때면, 오만가지 색으로 빛나는 커다란 보석함 안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케이크 스탠드의 키 높은 케익들과, 아이싱이 흐르는 파운드 케익, 너무 큰 아몬드 크라상과 작고 예쁜 타르트들... 그 앞에 서면 심장이 뛰고 모든 게 다 잘 될 것만 같다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같이 마음에 드는 선택지들 중 내 맘대로 고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키가 작은 나는 턱을 살짝 들어 디저트 진열 케이스 너머의 카페 직원을 불러 주문을 했었다.

이걸 달라고 하면서도 저게 더 맛있으려나 고민함과 동시에 아무려면 어때, 상관없었다. 혼자 디저트를 주문할 때면 내 앞에 놓은 접시 위 케익을 위해 손뼉 사이를 좁게 하여 빠르고 주책맞은 박수를 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 마음을 기억하다 보면 고독해지는 혼자만의 베이킹 시간이 조금 수월해진다.

 지금도 디저트 케이스를 보는 기분에는 변함이 없다. 그 기쁨과 마음의 평화를 내 삶에 주체적으로 가져와 스스로 실천하자고 마음먹은 것이 베이킹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디저트 쇼케이스 앞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또 다른 곳에서 내가 주도적으로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쿠키 박스 만드는데 필요한 추진력을 얻는다.  베이킹을 하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로를 받고, 내가 선물한 케익과 쿠키를 받은 사람들의 행복에서 나 자신에 대한 애정을 얻기도 한다.

 

 나를 내가 기쁘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아주 중요하고 또 연습을 필요로 한다. 나의 자기애는 내면에서 저절로 나오지 않고, 마음 편한 독백을 벗어나 타인과 거리낌 없이 순수한 고마움과 기쁨의 언어를 나눌 때, 이 세상에서 내가 딛고 서 있는 공간이  완전한 낭비는 아니라는 것을 느낄 때. 그럴 때 나 자신에게도 민망하지 않은 자기애를 느낀다. 나에 대한 확신이 든다.

 쿠키 박스를 받을 선착순 n명에 안에 들게 되면 상상 이상으로 사람들은 기뻐한다. 얼굴도 모르는 남이 기뻐할 때가 유난히 특별하다. 소셜 미디어상 감정이 느껴지지 않던 프로필 사진에 온도가 생기고, 일방적으로 지켜 봄을 당하는 입장에서 동등하게 대화하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이 느껴진다. 계정 아이디로만 보다가, 쿠키 박스를 보내기 위해 그들의 주소와 이름을 적을 때에 그 사람들은 진짜가 된다. 드디어 박스가 전달되었다는 소식과 때로는 사진을 받아볼 때, 내 테이블에 있던 작은 쿠키들이, 패키지의 내 손글씨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누군가 쿠키와 케익을 만들 때, 그것이 먹고사는 일이 될지라도, 다름 사람이 원하고 그 사람이 그것으로 행복을 찾는다면 그 의미는 깊다. 처음 베이킹을 한 순간부터 나누는 것 까지 모든게 베이킹의 가장 멋진 결과물이라는 사실처럼.




 베이킹을 떠나서... 나는 여전히 내 삶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져있다. 고민을 오래 하다보니, 고장 난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희망이 여기저기 보였다가 이내 사라진다. 절망과 희망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찾아온다. 때로는 분명한 선택지를 주기도 한다, 오늘은 절망해볼래? 희망을 가져볼래? 적어도 나는 생을 마감하기 전, 케익과 파이 속에서 애틋한 자기애를 찾았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찾지 못한 사람은 아니게 되었다. 그것으로 오늘은, 희망이 우선인 날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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