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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치도치상 Jan 14. 2024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일은 제 역할이 아닙니다

프릿츠 펄스와 예수, 상담자, 부모

독일어 Gestalt는 ‘부분의 집합보다 전체가 더 큰’이라는 의미입니다. 게슈탈트 치료에서는 부분과 부분을 합친 것보다 전체가 온전히 더 크다고 합니다. 이러한 단어의 뜻을 통해서 게슈탈트 치료를 유추해 보면, 내담자(client/patient)가 현실의 일부만을 바라보는 데에 머물지 않고 온전한 자신의 전체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있습니다. 


창시자 프리츠 펄스(Fritz Pearls)에 따르면, 현실은 우리가 바라보고 인지하여 해석한 현실입니다. 우리 각자가 바라보는 현실은 현실 그 자체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진실을 부정합니다. 대체로 자기 세계관, 즉 자기가 바라보고 인지하여 해석한 현실이 절대적, 객관적으로 옳다고 믿습니다. 펄스는 삶의 문제점이 이러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말을 종종 합니다. “내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말이야.”, “너는 그게 문제야. 왜 세상을 그렇게 살아?”, “이게 객관적인 사실이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바라보는 “사실”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실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사실”을 상대방은 보통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그 “사실”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 상대방은 “객관적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자신을 거부했다고 믿게 됩니다. 


펄스는 인간의 경험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시각에 의해서 해석된다고 믿습니다. 각 개인이 경험하는 “사실”은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게슈탈트 치료는 먼저 개인이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자각(awareness)하도록 돕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각으로 현실을 보다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독창적인 시각을 인정하는 것을 돕는 것이 게슈탈트 치료의 목적입니다. 


펄스는 이러한 작업 위에 각 개인은 사회, 가정, 환경 등에서 얻어진 가치관을 버리고 스스로의 참된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각 개인은 자신의 세계를 직접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그 자각 위에 개인은 뚜렷한 주관을 세웁니다. 개인은 개인적 가치를 보다 풍요롭게 찾아나갈 수 있게 됩니다. 이로써 개인은 주변 사람들 역시 각자의 세상에서 각자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게슈탈트 치료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는 개개인의 세계를 개개인의 시선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그리고 뚜렷한 주관 위에 각자의 가치를 세워야 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 16:13-15)


예수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가 이런 사람이다 혹은 저런 사람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본질은 각자가 예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입니다. 프릿츠 펄스의 작업과 비슷합니다. 개인은 사회, 가정, 환경 등에서 얻어진 가치들이 있습니다. 펄스는 그런 가치는 개인의 삶에 부차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각 개인은 자신의 뚜렷한 주관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만일 주관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자신만의 시각을 세워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는 그래서 제자들 한 명, 한 명은 스승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묻습니다. 사회가 뭐라 하든, 가정에서 뭐라 하든, 환경적으로 어떤 가치가 중요하다고 말하든지 그런 것들은 부차적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훨씬 삶에 중요한 점이라고 말합니다. 


상담을 하러 오시는 분들에게 저는 종종 이런 얘기를 합니다. 제가 하는 역할은 내담자의 삶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고요. 보통 제게 다시 물으십니다. 그러면 왜 상담을 하는지를요. 제가 이어서 대답합니다. 삶을 바꾸는 일은 스스로 해야 할 몫입니다. 제가 하는 역할은 내담자 분의 시각을 이해하고, 그 시각을 통해서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그 세상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를 고민하는 일이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어느 누구의 삶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제 아이의 삶도 바꿀 수 없습니다. 저는 부모가 자녀의 생각을 바꾸고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만의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세상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실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열심히 돕는 사람일 뿐이죠.


예수가 2000년 넘게 가르친 것과 프릿츠 펄스가 아마도 제 생각을 충분히 뒷받침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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