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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무려 한강을 해체해 보겠습니다 (2)

채식주의자 해체하기

by 도치도치상
아직 어두운 새벽, 지우가 깨어나기 전까지의 서너시간, 어떤 살아 있는 것의 기척도 들리지 않는 시간, 영원처럼 길고, 늪처럼 바닥이 없는 시간, 빈 욕조에 웅크려 누워 눈을 감으면 캄캄한 숲이 덮쳐온다. 검은 빗발이 영혜의 몸에 창처럼 꽂히고, 깡마른 맨발이 진흙에 덮인다. 그 모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면, 어째서인지 한낮의 여름 나무들이 마치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들처럼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영혜가 들려준 환상 때문일까. 살아오는 동안 보았던 무수한 나무들, 무정한 바다처럼 세상을 뒤덮은 숲들의 물결이 그녀의 지친 몸을 휩싸며 타오른다. 도시들과 소읍들과 도로는 크고작은 섬과 다리들처럼 그 위로 떠올라 있을 뿐, 그 뜨거운 물결에 밀려 어디론가 서서히 떠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의 물결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새벽 좁다란 살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한강, 채식주의자

한강 편은 몇 편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노벨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한국 소설이잖아요. 그리고 제 스타일로 어? 어떻게 구현해야 하지?라는 고민을 많이 하게 만드는 작품이라서요. 뭔가 독백도 많고 사유도 많고 환상과 현실이 중첩되고 하니까요.


1. "새벽"

이 부분을 어떻게 그림처럼 그려볼까 고민을 했습니다. 일단 새벽은 시간대를 가리키는 추상적인 단어죠. 그래서 전 새벽의 모습을 그리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벽 때엔 보통 가로등 불빛이 집을 비추더라고요.

집 앞의 가로등 불빛이 거실까지 닿았다.


2. "깨어나기 전까지 서너시간, 살아 있는 것의 기척도 들리지 않는 시간"

깨어나기 전에 기척이 들리지 않는 시간대를 묘사해야 하네요. 새벽에 화장실 가고 싶어서 일어나면 보통 어둡기도 하고 뭔가 제대로 안 보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살아 있는 것들"은 자는 시간이니 살아있지 않은 것들의 소리를 넣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불빛에 벽걸이 시계가 일렁였다. 초침소리, 냉장고의 컴프레서 소리가 들렸다.


3. "영원처럼 길고, 늪처럼 바닥이 없는 시간,"

이건 화자의 개입이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욕조에 인혜(영혜의 언니)가 웅크려 앉는 거니까 수도꼭지에서 물이 조금씩 떨어지고, 불규칙적인 물방울 소리를 더 얹으면 끝내주겠다는 생각에 미쳤어요.

불규칙적으로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졌다. 하나, 둘셋, 넷,, 일곱.


4. 인혜의 해리 증상

정신적 해리를 겪게 되면 숫자도 감각도 희미해진다고 해요. 그러니까 물방울이 불규칙하게 떨어지는 걸 묘사한 것도 해리 증상으로도 묘사할 수 있는 거고요 (꺅! 미쳤어 둘셋 숨표 넷 숨표 둘일곱!). 그리고 호흡이 불규칙하게 이어지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하나, 둘셋, 넷,, 일곱. 인혜는 욕조에 몸을 웅크렸다. 서늘했다. 아니, 엉덩이 바닥에 감각이 없었다. 짧은 콧김이 쓱,스슥, 쓱, 쓱 비강을 두드렸다. 눈이 감겼다.


5. 환상 1

검은 빗발은 사실 우리가 비의 색깔을 보긴 어렵잖아요. 오히려 바닥에 모인 빗물을 봤을 때 색깔이 보이기도 하고 환상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진행되기도 하니까요.

비가 내렸다. 검은 그림자 숲이 인혜를 뒤덮었다. 검게 물든 바닥 위로 영혜가 서 있었다.


6. 환상 2

영혜의 몸에 빗발이 창처럼 꽂히고, 맨발에 진흙이 덮였다는 건 화자의 진술입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묘사를 해야 할까... 고민하다 이렇게 써봤습니다.

빗방울은 영혜 위로 튀지도 흘러내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피부 속을 뚫고 박혔다. 바닥의 진흙은 발등을 덮었다.


7. 영혜

인혜의 환상 속 영혜의 모습은 지쳤다고 하죠. 이것도 화자의 진술이니까 그림을 그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팔이 축 쳐지고 얼굴 표정이 낯빛이고 불길에 감싸졌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면 충분히 지쳐 보이겠네요.

영혜의 팔은 늘어져있었다. 눈두덩이는 잿빛, 눈썹은 사선, 눈꺼풀은 반쯤 감겼다. 불길이 그녀를 감싸안았지만 그녀는 몸부림을 치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8. 환상의 의미를 곱씹음

아! 이 부분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상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했다라. 이미 인혜의 해리, 환상을 묘사했으니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장면을 보여주면 되겠다 싶었어요.

한편, 인혜는 영혜의 언니인데 영혜가 자기가 자꾸 나무가 되어간다면서 밥을 안 먹으니 얼마나 언니로서 괴롭겠어요. 그래서 영혜의 환상을 보곤 아마도 언니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닐까 싶어서 추가했습니다.

인혜는 눈을 떴다. 은색수도꼭지, 상아색 욕조, 샤워커튼, 비누.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다. 짧은 숨이 끊어지듯 이어졌다. 도시, 섬, 다리, 물결. 푸른 불길, 나무. "영혜야-"


자 그럼 최종본입니다!

집 앞의 가로등 불빛이 거실까지 닿았다. 불빛에 벽걸이 시계가 일렁였다. 초침소리, 냉장고의 컴프레서 소리가 들렸다. 불규칙적으로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졌다. 하나, 둘셋, 넷,, 일곱. 인혜는 욕조에 몸을 웅크렸다. 서늘했다. 아니, 엉덩이 바닥에 감각이 없었다. 짧은 콧김이 쓱,스슥, 쓱, 쓱 비강을 두드렸다. 눈을 감았다.

비가 내렸다. 검은 그림자 숲이 인혜를 뒤덮었다. 검게 물든 바닥 위로 영혜가 서 있었다. 빗방울은 영혜 위로 튀지도 흘러내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피부 속을 뚫고 박혔다. 바닥의 진흙은 발등을 덮었다. 인혜는 고개를 저었다. 영혜의 모습 뒤로 길게 뻗은 시퍼런 나무가지들 사이, 또 그 사이에서 푸르딩딩한 불꽃이 일었다. 영혜의 팔은 늘어져있었다. 눈두덩이는 잿빛, 눈썹은 사선, 눈꺼풀은 반쯤 감겼다. 불길이 그녀를 감싸안았지만 그녀는 몸부림을 치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도시, 소읍, 도로, 크고 작은 섬, 다리.
불길 뒤로 떠밀려 물결처럼 흘러갔다.

인혜는 눈을 떴다. 은색수도꼭지, 상아색 욕조, 샤워커튼, 비누.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다. 짧은 숨이 끊어지듯 이어졌다. 도시, 다리, 물결. 푸른 불길, 나무.
"영혜야-"


개인적으로 제 버전이 더 재미나네요.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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