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해체하기
저 껍데기 같은 육체 너머, 영혜의 영혼은 어떤 시공간 안으로 들어가 있는 걸까. 그녀는 꼿꼿하게 물구나무서 있던 영혜의 모습을 떠올린다. 영혜는 그곳이 콘크리트 바닥이 아니라 숲 어디쯤이라고 생각했을까. 영혜의 몸에서 검질긴 줄기가 돋고, 흰 뿌리가 손에서 뻗어나와 검은 흙을 움켜쥐었을까. 다리는 허공으로, 손은 땅속의 핵으로 뻗어나갔을까. 팽팽히 늘어난 허리가 온힘으로 그 양쪽의 힘을 버텼을까.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영혜의 몸을 통과해 내려갈 때, 땅에서 솟아나온 물은 거꾸로 헤엄쳐 올라와 영혜의 샅에서 꽃으로 피어났을까. 영혜가 거꾸로 서서 온몸을 활짝 펼쳤을 때, 그애의 영혼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하지만 뭐야.
그녀는 소리내어 말한다.
넌 죽어가고 있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커진다.
그 침대에 누워서, 사실은 죽어가고 있잖아. 그것뿐이잖아.
그녀는 입술을 악문다. 피가 비칠 만큼 이의 힘이 세어진다. 영혜의 무감각한 얼굴을 움켜쥐고 싶은 충동을,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세차게 흔들고, 패대기치고 싶은 충동을 그녀는 억누른다.
한강, 채식주의자.
자, 세 번째 편입니다. 노벨문학상 작품이니 세 회차는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이번 발췌단락은 인혜가 영혜의 나무화에 의구심을 품는 문단입니다. 인혜의 사유와 영혜의 나무가 되는 모습이랑 중첩되고 또 현실로 돌아온 인혜의 대사와도 중첩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저의 행동주의, 영화적 문체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매우 고난도 작업이었어요.
1. 인혜의 사유
저 껍데기 같은 육체 너머, 영혜의 영혼은 어떤 시공간 안으로 들어가 있는 걸까. 그녀는 꼿꼿하게 물구나무서 있던 영혜의 모습을 떠올린다.
사유는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서 저는 표현을 지양합니다.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눈을 감고 상상하면 될 것 같아요. "어떤 시공간 안으로" 역시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걸 "시간", "공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우리는 표현하는 것이니 이걸 제가 그대로 가져다 쓰기는 제 문체적 특성상 좀 무리입니다. 어쨌든 인혜는 영혜가 물구나무선 모습을 떠올린 거니까 이렇게 저는 써봤습니다.
인혜는 눈을 감았다. 아득하게 펼쳐진 곳에 영혜가 물구나무를 서 있다.
그럴듯하네요.
2. 영혜의 모습을 그리는 인혜
영혜는 그곳이 콘크리트 바닥이 아니라 숲 어디쯤이라고 생각했을까. 영혜의 몸에서 검질긴 줄기가 돋고, 흰 뿌리가 손에서 뻗어나와 검은 흙을 움켜쥐었을까. 다리는 허공으로, 손은 땅속의 핵으로 뻗어나갔을까. 팽팽히 늘어난 허리가 온힘으로 그 양쪽의 힘을 버텼을까.
그려진 부분들이 많아서 제 문체대로 묘사하기는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인혜가 질문을 던진 거죠. 질문은 일종의 사 유니 까요. 그러면 전 인혜의 묘사 자체로 남기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제는 광합성과 물을 빨아들이는 부분입니다.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영혜의 몸을 통과해 내려갈 때, 땅에서 솟아나온 물은 거꾸로 헤엄쳐 올라와 영혜의 샅에서 꽃으로 피어났을까.
그래서 나무가 어떻게 광합성과 물을 혼합하여 자양분을 쓰는지 일단 과학적 과정을 탐색해 봤고요. 아, 세포가 빛을 끌어당기고 물을 빨아들인다고 표현하면 되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됩니다.
콘크리트 바닥이었는지 영혜의 손이 검다. 손끝은 콘크리트 자갈 틈을 강하게 움켜줬고, 앙상하게 남은 흰 뼈와 검질긴 정맥이 피부 위를 뚫었다. 다리는 아찔한 공간을 향해 기다랗게 활짝, 허리는 팽팽하게 금세 쓰러져버릴 듯한 몸을 버티고 있다. 너덜너덜해진 발톱은 빛나고 있다. 세포는 힘껏 빛을 끌어당기고, 물을 빨아들인다. 샅에서는 꽃이 몽우리 졌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영혜가 거꾸로 서서 온몸을 활짝 펼쳤을 때, 그애의 영혼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영혼"이라는 단어도 추상적 개념입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 건 사유의 영역이니 제 문체라면 그대로 쓰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단순화했습니다.
거꾸러진 영혜의 얼굴 근육은 제자리를 지켰다.
"거꾸러진"이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있잖아요. 첫 번째로는 영혜가 현재 물구나무를 서고 있으니 "거꾸러진"이 적절한 것 같고, 두 번째로는 "바르지 않은 상태", "넘어진" 이런 의미가 있잖아요. "얼굴 근육은 제자리를 지켰다."라고 하니까 보통 물구나무를 서면 얼굴이 빨개지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힘겨워지죠. 그런데 얼굴 근육은 제자리를 지킨 그러니까 평온한 상태를 말해주면 재밌겠다 싶었어요. 왜냐면 영혜는 자기가 나무라고 생각해서 계속 물구나무를 서잖아요. 그런데 자기는 평온하겠죠. "거꾸로 선 게" 본래 자신의 모습이니까요.
3. 인혜의 대사
하지만 뭐야.
그녀는 소리내어 말한다.
넌 죽어가고 있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커진다.
그 침대에 누워서, 사실은 죽어가고 있잖아. 그것뿐이잖아.
대사는 그대로 가져오면 될 것 같고요. 제 문체로는 "말한다", "목소리가 커진다"는 화자의 개입이라서 지양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바꿨어요.
"하지만 뭐야. 넌 죽어가고 있잖아!"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 침대에 누워서, 사실은 죽어가고 있잖아. 그것뿐이잖아!"
4. 현실의 인혜
그녀는 입술을 악문다. 피가 비칠 만큼 이의 힘이 세어진다. 영혜의 무감각한 얼굴을 움켜쥐고 싶은 충동을,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세차게 흔들고, 패대기치고 싶은 충동을 그녀는 억누른다.
인혜가 사유/영혜를 상상했던 장면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옵니다. 근데 제가 "충동"을 어떻게든지 표현을 해야 하는데 제 문체적 특징상 "충동"을 표현하기가 어렵네요. Show, don't tell이라서요. 차라리 인혜가 마치 영혜의 얼굴을 움켜쥐고, 몸뚱이를 흔들고, 패대기치는 걸 상상하는 장면으로 그린 후에 인혜가 눈을 뜬 걸로 표현하면 되겠다 싶었어요.
윗입술을 물었다. 잇몸에 피가 몰려 더 붉어졌다. 손을 움켜쥐었다. 영혜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거꾸로 선 영혜의 몸뚱이를 세차게 흔들다가 패대기를 쳤다.
눈을 떴다.
매우 그럴듯해졌습니다.
자 이제 완성본입니다!
인혜는 눈을 감았다. 아득하게 펼쳐진 곳에 영혜가 물구나무를 서 있다. 콘크리트 바닥이었는지 영혜의 손이 검다. 손끝은 콘크리트 자갈 틈을 강하게 움켜줬고, 앙상하게 남은 흰 뼈와 검질긴 정맥이 피부 위를 뚫었다. 다리는 아찔한 공간을 향해 기다랗게 활짝, 허리는 팽팽하게 금새 쓰러져버릴 듯한 몸을 버티고 있다. 너덜너덜해진 발톱은 빛나고 있다. 세포는 힘껏 빛을 끌어당기고, 물을 빨아들인다. 샅에서는 꽃이 몽우리졌다. 거꾸러진 영혜의 얼굴 근육은 제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뭐야. 넌 죽어가고 있잖아!"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 침대에 누워서, 사실은 죽어가고 있잖아. 그것뿐이잖아!"
윗입술을 물었다. 잇몸에 피가 몰려 더 붉어졌다. 손을 움켜쥐었다. 영혜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거꾸로 선 영혜의 몸뚱이를 세차게 흔들다가 패대기를 쳤다.
눈을 떴다.
어떠신가요? 전 제 문체가 더 재밌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