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섬 여행의 대미 트랜즈 알파인
이제부터는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편안한 말투로 이야기를 써보려고 해. 괜찮겠죠. 독자 여러분. ^^.
그레이마우스에서는 크라이스트처치 집까지 코니와 쉐인은 차로 먼저 보내고, 나는 열차 '트랜즈 알파인'을 타기로 했어. 웨스트코스트 여행 마지막 날이 아쉬운 내 마음처럼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군.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공공도서관이 있어서 비를 피하고 열차 출발까지 남은 시간도 보냈지. 동양인은 나뿐.
그레이마우스 역으로 향했어. 뉴질랜드의 여름은 우리의 더운 여름이 아니야. 비바람도 거세고 쌀쌀하더군. 따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날씨였어. 배낭에 컵라면이 있었잖아. 커피숍에 들어갔지. 염치불구하고, 커피를 주문하고는 덤으로 뜨거운 물 한 컵 부탁했지. 그런데 카페 직원이 못 알아듣는 거야. 결국 물은 채웠어. 끓는 물은 아니었지만 컵라면 먹기에는 충분했어.
비 내리는 쓸쓸한 풍경이 보이는 창가에 자리 잡았어. 그때 알았어. 비바람 치는 쌀쌀한 날씨에 여행지에서 혼자 먹는 컵라면이 가장 맛있는 컵라면인 줄. 이후 마시는 따뜻한 커피는 운치를 더했지. 완벽한 조합이었어.
이제 그레이마우스 역이야. 쉐인이 프린트해 준 예매확인서를 내밀고 승차권으로 바꿨지. 한가하던 기차역이 떠들썩해지며 여행객으로 붐비기 시작했어. 캐리어는 코니가 차에 싣고 갔기에 단촐한 차림의 승객은 나뿐인 것 같아. 여행객은 다들 캐리어가 있었서 꼭 비행기 타는 기분이야. 캐리어를 싣는 열차 화물칸이 따로 있어. 짐을 실어주는 사람도 있고.
트랜즈알파인은 그레이마우스에서 크라이스트처치까지 운행하는 열차야. 구글링 해보면 거리 223km 편도 5시간 걸린다고 나와. 그럼 겨우 시속 45km잖아. KTX로 1시간이면 되는 거리를. 불평할 것 없어. 남섬의 서든 알프스와 캔터베리 대평원의 장엄한 풍경을 5시간 동안 느긋하게 감상하는 것이 이 열차를 타는 이유니까. 원한다면 식사도 가능해. 나는 생략했어. 내가 집에 도착하면 코니가 쌍둥이 딸과 옆집 바바라도 불러 파티를 한다고 했으니까.
사울 레이터의 사진처럼 빗방울로 얼룩진 창 밖 풍경을 보며 그레이마우스역을 천천히 출발했어. 흐릿한 경치를 보면서.
열차 안은 빈좌석이 더 많아. 승객은 경치 좋은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있었지. 헤드폰을 끼면 지나가는 여정과 중간중간 정차역과 풍경에 대한 안내를 들을 수 있어. 뉴질랜드 엑센트가 강하지 않아서 알아들을 만 해.
오티라 터널에 진입하기 전에 아서스패스 역에서는 좀 길게 10분 정차해. 승객은 다들 내려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지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웨스트 코스트에 갈 때는 차로 서든 알프스를 넘어갔고 돌아올 때는 서든 알프스를 지하로 관통한 거야. 둘 다 해보니 갈 때는 나처럼 갈 때는 차로 가고 돌아오는 건 열차가 좋겠어. 오티라터널은 서던알프스를 관통하는 약 9km 열차터널이야. 열차로 터널을 지나는 데 15분 정도 걸려. 이제는 우리나라에도 긴 터널이 많아 이 정도를 가지고 길다 할 수 없겠지만 1900년대 초에 건설되었다는 걸 생각해 봐. 푸석푸석한 돌이 많아 당초 공사를 맡았던 업체가 부도나고 정부에서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해.
열차가 오티라 터널을 나오자마자 비 내리던 우중충하던 날씨가 쨍한 하늘로 바뀐 거야. 마치 예전에 영화관에서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처럼 눈이 부셔. 경치가 바뀌었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승객들이 다 함께 탄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라니까. 뉴질랜드 남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서던알프스 산맥 때문에 동서로 풍경과 기후가 다르다는 걸 실감했어. 크라이스트처지 근교에서 왜 멀리 보이는 저 산이 누렇지?라고 코니에게 처음 물었을 때 코니가 그랬지. 너무 당연하다는 듯 "여름이잖아" 이제 웨스트코스트의 푸른 풍경은 자취를 감추고 황량한 풍경의 연속이야. 생명력이 가득한 푸른 산 보다 이런 황량한 풍경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왜일까. 모두 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보면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이제 황야의 풍경에 익숙해지고 나니 벌써 종착역 크라이스트처치야. 플랫폼을 나서자 먼발치에서 마중나온 코니가 손 흔들고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