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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꾼 Feb 27. 2022

"나희도 정말 너 같네."

스물 다섯 스물 하나

하루는 친구에게 밤늦게 문자가 왔다.

"나희도! 정말 너 같네." 


나희도는 김태리가 연기한 <스물다섯, 스물 하나>에 극 중 여자 주인공 이름이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지만 대본을 읽었기 때문에 친구가 한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내 친구는 98년도 나희도의 모습을 보고 나의 생기 넘치던 옛 시절을 떠올린 것이다. "목소리도 행동도 에너지도 생김새도 다 너무 너야. 왜 목소리도 비슷하고 웃음소리도 비슷하지? 2화를 보는데 진짜 너무 너야." 만감이 교차했다. "난 너무 어른이 돼버렸어."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자 답장이 왔다.


"지금의 너도 아주 멋져. 나희 도도 크면 너처럼 돼."


글쎄. 최근 들어 웃고 떠들며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소리 지르면서 춤추고 뛰어다녔던 적이 언제였던가. 전혀 없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오싹하게 아팠다. 나를 잃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지금 막 삼십 대 중반에 들어섰고 이제야 정신 좀 차리고 어른답게 사는 것 같은데 현실을 다시 조각내서 처음부터 퍼즐을 맞춰야 하나? 하는 복잡한 생각도 들었다. 한마디로 내 인생의 구절판을 엎어버릴까 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친구의 마지막 말에 나는 안심했다. 

'그렇지. 그때의 나도 여기에 있고 여기의 나도 그때 거기에 있는데.'


숫자와 시간을 계산하면서 인생에 대해 많은 책임을 지는 것. 하루하루를 갓생이다 뭐다 쪼개며 스스로를 깨우치고 싶어 안달이 나도 크게 달라지는 것 없는 하루의 무료함. 이를 덤덤하게 달래는 어른으로 성장한 내가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고마워. 근데 있잖아... 그 드라마 4화에 내가 나와."


고등학교 시절 나라면, 친구들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든 좋아하는 선생님이 생겼든 오늘 아침 똥을 얼마큼 눴든 밥을 뭘 먹었든 길가에 꽃은 무엇을 봤든 실컷 말하는 게 재밌는 함박웃음을 가진 아이 었을 것이다. 드라마에 한 역할로 참여했고 그 콘텐츠를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다는 건 매우 희귀하고 재밌는 일이다. 무심결에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게 편한 상책이다 하고 생각하는 무채색의 내가 이상했다. 튀지 않고 무난하게 지나가버리는 일상이 편해져 버렸고 작고 소소한 일에 목숨 보태면서 큰 열정은 오히려 큰 시련을 주니까 접어버리라고 하루가 있음에 감사하라고 하며 만족해버리는 이런 내가 요즘, 진절머리 나게 불편했다.


친구의 마지막 말 몇 마디에 용기를 내서 SNS을 켰다. '여보세요.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어요~! <스물 다섯 스물 하나>에 곧 제가 나옵니다. 보시면 아는 척 먼저 해주세요!' 스토리를 올렸다. 발을 동동 굴렸다.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문자를 남겼다. 


"원래는 드라마에 나 나오는 거 다른 사람들한테 절대 알리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오는 것 같고 그래서 그게 너무 재밌고 유익한 기분이야. 이렇게 내가 변했다는게 다행스럽고 좋다. 다 너의 '나희도 정말 너 같네.' 라고 말해준 덕분이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났고 4화가 방영된 주말. 주변 사람들에게서 많은 연락이 왔다. 

알아보고 연락을 준 사람들도 있었고 우연히 봤다가 맞는지 확인 전화가 온 사람들이었다.

오랜만에 안부를 주고받았는데 그 기회가 매우 달가웠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메시지가 왔다.


"좋은 드라마 한편에 네가 나와서 더 좋은 드라마가 됐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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