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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꾼 Apr 16. 2021

넌 나의 분신이야.

꿈과 사랑

꿈은
배우가 아니라 '나'




2016년으로 기억한다. 


시골에서 상경한 나는 넓지만 30년 된, 방음 방한 없는 서울 등촌동 빨간 주택 3층에 동생과 몇 년째 살고 있었다. '글쎄 염창동 오피스텔이었던가?' 그건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참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동안 배우를 하겠다고 대형마트에서 일용직을 할 때다. 한 번은 마트 제육 코너에서 닭갈비를 팔았는데 장사에 아주 물이 올라있을 때라 일당 10만 원 정도 받으면서 근무했다. 서초구 아파트 단지 근처 큰 마트. 출근할 때 마주쳤던 한 아파트의 큰 골드빛 대문이 기억이 난다. 


한적한 오후의 마트, 느릿느릿 마실 걸음으로 작은 바구니를 끼고 걷는 아주머니들. 

나는 닭갈비를 용량에 맞게 담고 있었다.



"일도 잘한다 아가씨. 몇 살이야? 대학생이구나."

"아.. 저 졸업했어요."

"그래? 무슨 공부 했어?"

"미대요."

"나도 미대 나왔는데~ 어디?"

"홍대요."

아줌마는 밝고 순진한 표정으로 휘둥그레 물었다.

"뭐~? 그런데 이런데서 뭐해?"



번듯한 대학을 나와서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꿈을 키우던 청년들이 많았다. 그 당시는 지금보다 아르바이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근데 난 취직 문턱도 넘본 적 없는, 이력서 한 장 넣어 본 적 없는 배우를 꿈꾸는 임시직에 불과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스크랩북에 쓴 나의 꿈




사랑받고 싶어서 배우를 하려고 하니?



정말 오랫동안 배우라는 꿈에 다양한 토를 달아 왔다. 어렸을 적, 고등학교 때 낡은 용달차 안. 화창한 봄, 밖은 하얗고 뽀얗다. 아빠의 용달차 안은 흙먼지로 가득하다. 차는 십 년을 훌쩍 넘겨 의자 시트 스티로폼은 삐져나와있고, 손잡이는 은은히 광택이 난다. 여러 사람들이 엉겨 앉았던 흔적은 조수석을 납작하고 부드럽게 만들었으며 많은 인부의 색깔 있는 꽃무늬 고쟁이 바지를 떠올리게 한다. 아빠는 운적석에 앉았고 나는 조수석에 교복을 입고 앉았다. 아빠는 항상 두툼한, 두툼해도 너무 두툼한 장지갑을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데, 꺼내어 핸들에 팔을 기대고는 갈라진 입술로 마른 침을 부벼가며 입을 뗀다. 



"아빠가 늘 말하지. 넌 나의 분신이야. 어렸을 때 네가 아장아장 걸으면서 아빠 옆에 차 타고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컸네. 항상 지갑에 네 사진을 갖고 다닌다."



쪽 찐 머리를 하고 광주 시내에 나가서 찍은 증명 사진이다.



"아빠랑 너랑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 우리는 한 몸이라는 걸 잊지 마. 배 아파서 낳지는 않았어도 가슴으로 낳았다는 말이 있잖니. 네가 아프면 아부지도 아프고 네가 좋으면 아부지도 좋은 거야. 어디에 있어도. 그러니 열심히 살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딸을 얼마나 사랑하면 자신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빠는 나에게 사랑 보따리를 안겨줬다. 그리고 민들레 홀씨를 비유했다. 아빠는 씨앗을 잘 심었으니 홀씨가 되어 날아가 너는 너의 삶을 살라고. 어디에 있든 넌 나와 같다고.


그 기억은 나에게 있어 아빠의 원형과 같다. 사랑의 원형이었다. 


배우라는 덫에서 가장 오래 붙들린 질문은 '사랑'이다. 내가 이 일을 정말 사랑하는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에 남 앞에 서길 좋아하고 인기라는 요령을 바라는 것은 아닌지. 정말 사랑한다면 이 일에 나를 헌신할 수 있는지. 아빠에게 배운 사랑의 원형이 너무도 커서 꿈에 대한 본질적인 가치로 발목을 붙잡고 답을 캐기 위해 애썼다. 







같은 해 등촌동 빨간 주택 3층, 내방. 

독립심이 강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아는 문제없는 딸이던 내가 전화통을 붙잡고 아빠에게 통화를 걸었다. '야무져요.', '똑소리가 나요.','똑예라고 불러요. 똑똑하고 예쁘거든요.' 동생은 대기업 입사 시험 준비를 하느라 없었고 고요한 방에서 홀로 보내는 감옥살이는 내 하루의 전부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똑똑한 둘째 딸. 아빠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린다. 



"여보세요."


"........."



목놓아 울었다. 등촌동이 떠나가라고 퍼부어 울었다. 방 가운데 앉은 내가 검은 샘이었다. 서울살이가 힘들다는 말을 대신해 수화기 넘어 우는 딸의 울음소리를 듣고 아빠는 대번에 알았다. 보통 일이 아니구나. 지금도 생각이 난다. 아빠의 당황한 목소리에 마른침을 바르는 소리. 어떻게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갈라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쉰 목소리가 많이 힘드냐고 물었다. 



아빠는 그 뒤로도 나의 서울 살이와 꿈을 좇는 망망대해의 고통을 몸으로 느끼고 계셨다. 

몇 해 뒤, 하루는 아빠한테 전화 한 통이 왔다.



"미안하다 딸아, 이 아부지가 능력이 없어서. 교육도 많이 받고 사업체라도 하나 있었으면 떡하니 일자리하나 줬겄지, 명함이라도 내밀어서 알아줄 사람이었으면, 내가 네 뒤를 봐줬겄지. 근데 그럴 수가 없어서.. 미안하다 딸아."



이 말을 들었을 때 내 기분이 어땠을까?

정말 참담했다.

말하지 않아도 함께 보내온 세월이 꽃 같은 봄이라 우린 가슴 저미게 서로를 이해했다. 

아빠와 나는 분신과 같았으니까. 






배우? 아니. 나를 먼저 살릴 거야.


예쁨을 많이 받고 자라서 배우를 원했느냐고, 텔레비전이 보급되고 재밌는 드라마를 많이 보던 시절에 커서 연예인이 익숙하냐고, 교회에서 성탄절 연극 무대를 통해 박수갈채를 받아서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아빠에게 쌍방의 사랑을 배웠고 너무 헌신적이고 고결해 배우라는 일에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스스로가 못마땅했다. 죽음을 상상하거나 자기 부정을 하며 낮아진 자존감으로 꿈을 키우기란 쉽지 않다. 음울한 정신 상태는 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키우기 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시들게 만든다. 세상의 희망에 열렬히 코웃음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눈빛이 반짝이고 표정이 보드라운 마음씨 고운 똑예다. 


이후, 나를 살리기 위해 본격적인 자기탐구에 접어든다. 

원래의 나, 초등학교 5학년 때 쓴 좌우명처럼. '활발하고 슬기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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