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랑꾼 Apr 16. 2021

살기 싫음 살지마.

엄마와 나

죽음과

은하수 곳간






스물한 두 살쯤, 그땐 카페 내에서 흡연이 가능했다. 흡연 카페로 유명한 홍대의 룸 카페에서 알바를 하던 시절. 얹혀살던 고모 집과 마을버스 타면 이동거리도 가깝고 사장님도 깐깐한 게 일만 잘하면 사적인 터치도 없는, 장사도 무척 잘돼서 서빙하는 맛도 나는 그런 재밌는 일터였다. 우리는 검정 앞치마를 입고 홀을 다녔는데 타임당 3-4명의 알바생이 있을 만큼 넓고 인기가 많았다. 상상해보라. 흡연이 가능하고, 커튼이 있어 룸으로 사생활 보호가 된다니. 홍대는 핫했고 미대입시를 하면서 열아홉 때부터 발 딛던 곳이라 나에겐 서울에 제1고향이기도 했다. 



알바생 1 : 작고 단단한 몸매에 말도 야무지게 하면서 사장님 오른 팔격인 경력이 오래된 친구.

알바생 2 : 희고 키가 크고 허리가 가늘며 골반이 넓은 얇은 생머리의 수수한 미소의 친구.

알바생 3 : 골격과 뼈대가 크고 목소리가 귀여운 애교가 많은 친구.

그리고 나.



공부 잘하는 알바생 1, 가정적인 알바생 2, 섬세한 알바생 3, 그리고 나.


우리는 꽤 재밌고 팀플레이가 잘 맞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을 했다. 당시 반스 검은색 어센틱을 신고 그레이톤 스키니진을 입었던 기억이 난다. 테이블 넘버를 외우고 벨이 울리면 주문을 받으러 간다. 민트초코가 인기 있었다. 초록색 민트 시럽에 초코 토핑을 뿌렸다. 나는 커피 제조 일은 잘 못했고 주로 서빙 전문이었다. 사장님이 항상 음료를 제조하고 옆에 어시가 한 명 붙는다. 입구에 들어오면 주방 조리대가 있고 음료가 올려지는 선반이 있었는데 항상 쟁반이 3-4개씩 착착착 쌓이며 순번대로 서빙이 됐다. 왠지 그때 마셨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맛이 느껴진다. 그때는 입시 때 습관이 남아서 편의점 김밥이나 군것질이 주식이었는데 한 번은 위경련으로 쓰러질뻔하다가 응급실에 갔던 기억이 있다. 아무쪼록, 이번 이야기의 중심은 바로 알바생3이다. 


난 개인적으로 알바생 1,2,3중에 3이 동생이기도 했고 같은 예술가 감수성이 잘 맞아서 애정 했다. 손에도 감각이 물씬 있는 친구였다. 작은 타투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손님들이 한차례 빠지고 한산해지자 조리대 안쪽에서 기대어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한 여름이라 내부는 에어컨으로 빵빵했다. 거의 아이스 창고라고 생각하면 된다. 알바생3이 팔찌를 예쁘게 차고 있길래 여름엔 악세사리가 돋보이는 계절이 아닌가. "우와. 이 팔찌 되게 귀엽다. 너랑 잘 어울려. 왜 이제 봤지?" 하면서 서스름 없이 그 팔찌를 잡아 당겼다. 고무줄로 엮인 비즈 팔지는 탱탱하게 늘어났다. 알바생 3이 손목을 뒤로 살짝 감추며 언짢아하는 기색을 비췄다. '내가 실수했다. 남의 팔찌를 맘대로 당기다니. 기분이 나빴나?' 하고 알바생3 눈을 봤다.


강아지처럼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흰 피부는 잠깐 백지장이 됐다가 연분홍 빛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뭘 봤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난 보지 못했다. 그리곤 알바생3이 내가 미안해하는 기운을 비추자 팔찌를 들어서 손목에 자국을 보여주며 말했다. "아.. 이거 가리려고 한거에요 언니." 


손목을 그은 자국. 삶을 포기하려고 선택한 시도. 


나는 미처 알지 못했고,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팔찌로 이야기를 돌렸다. "아~ 왜 못 봤지. 매번 차고 왔었어? 예뻐. 잘 어울려.", "고등학교 때 철없어서 그랬어요." 알바생3은 팔찌 비즈를 톡톡, 손목 자국을 문지르면서 빙그르 웃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자살'이라는 것과 '어린 친구들', '고등학생', '청년', '아픔', '고통'을 생각하게 된다. 내 곁에 자해를 하거나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친구를 직접 겪은 건 사실 처음이었다. 




엄마와 나.



엄마는 도망가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엄마는 은연중에 "죽고 싶다.", "살기 싫다."라는 말을 종종 뱉었다. 진지한 실천의 고백이라기 보다 정말 삶이 너무 고통스럽고 벗어날 수 없는 시련이니 자신의 괴로움을 알아달라고 말하는 극단적 표현이었다. 말은 정서로 기억된다. 엄마는 나를 무척 사랑했다. 경제적 부담을 철저하게 짊어졌고 힘든 내색 없이 손에 고름이 지고 짓무르도록 일했다. "엄마, 나 돈 좀 줘."라고 용기 내서 말하면 돌아오는 말은 "내가 은하수 곳간인 줄 아니. 달라고 하면 무조건 나오게. 퍼도 퍼도 나오는 줄 알아!" 난 엄마가 돈이 없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하며 괴로워하는 것과 내게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라고 허용하는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는 역설 사이에서 엄마가 역겹고 미웠다. 


'어른들은 왜 솔직하지 못할까?', '왜 모두 다 짊어지려고 하는 걸까?' 그 생각이 사춘기 시절 나를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반항은 한때였고 엄마에 대한 증오와 사랑이 응어리로 남았다. 그리고 내 감정 기복에 꼬리를 달았다. 


하루는 싸웠다. 다퉜고 둘이 똑 닮아서 이를 갈며 덤볐다. 엄마가 울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기 싫으면서도 남남처럼 말했다. "제발 우는소리 좀 그만해! 난 엄마 목소리가 듣기 싫어!" 놀란 엄마는 물었다. "엄마 목소리가 듣기 싫어? 그럼 넌 도대체 엄마랑 어떻게 사니?", "그니까 내 말이. 살기 싫어 그니까."



엄마가 그렇게 손이 베이고 무릎이 시큼하고 옷에서 음식 냄새가 나고 끼니 때울 시간을 놓쳐 허겁지겁 먹고 밀려오는 피로를 감당하기 어려워 배를 깔고 눕는 건 모두 사랑하는 나 때문이었는데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묵직한 목소리로 결의에 찬 엄마는 그렇다면 자신이 이렇게 짐 지며 피땀 흘릴 의무가 사라졌다고 마음먹고 "살기 싫음 살지 마."라고 두 눈 똑바로 뜨며 말했다.


엄마는 책임을 다하고 헌신하되 나의 잘못에 완강히 반응했다. 단박에 사랑을 단절할 준비가 된 사람처럼 말했고 나는 꼬꼬마 철부지라서 타일러주길 바랐지만 두 사람은 칼날처럼 챙챙 거리며 성질을 굽힐 줄 몰랐다. 


여린 엄마, 강인한 엄마, 웃음이 많고 잔정이 많은 엄마, 책임감과 생활력이 강한 엄마, 예쁜 엄마.

여린 나, 강인한 나, 웃음이 많고 잔정이 많은 나, 책임감과 생활력이 강한 나, 예쁜 나.


우린 너무 같다.



20대 후반, 마음의 감옥에 늪과 어둠을 동냥 삼던 시절 난 자살의 의미를 뼈져리게 느꼈고 가능성을 봤다. 누군가에게 시련과 고통은 그 사람이 짊어질 수 없을 만큼 감당하기 어렵게 찾아오며 평생에 걸쳐 그 기간과 때는 아무도 알 수 없고 통제 불가능하다. 30살을 넘긴 언니, 오빠들을 보며 어떻게 살아있느냐고 묻던 시절에 난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원하는 대로 계획하는 대로 계산하는 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고 모질하고 부족해서 받는 대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후, 스스로를 옭아매는 패턴들을 찾아 개선하기 위해 시간을 쏟았다. 자극적인 맛에 빠지고 폭식과 과식을 일삼고 정서적 허기에 빠져 허우적거리거나 미친 듯이 자고 어둠에 숨고 스스로를 어떻게든 자멸시키기 위해 하는 모든 파괴적인 행동들.....


망가지는 건 결국 나일뿐, 처한 현실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자기 비난은 일종의 자해였다. 아마도 그때 난 우울증이었다. 세상에서 나를 지우고 싶었으니까.


'계정이 삭제되셨습니다.'


엄마는 도망가지 않았다. 삶은 역경에서 포기 없는 선택으로 이뤄진다.

난 나를 살리기로 마음먹었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진정한 존경심이 가득 차올랐다.

친절과 사랑은 고난과 역경으로부터 이루어졌다. 살기 싫으면 살지 않을 수 없고 잘 살아내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가족을 책임졌던 엄마를 보며 오늘도 나는 나를 책임지기 위해 건강한 하루를 선택하려고 노력한다.

작가의 이전글 넌 나의 분신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