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2021 회고
2022년 새해가 밝은지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올 한 해 목표를 세우며 힘차게 맞이한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김없이 몰려드는 일상의 루틴들에 삼켜져 그 다짐이 벌써 낡아버린 느낌이다. 뒤늦었지만 그래도 작년에 못한 회고를 이제서라도 하려고 한다. 안 하고 넘어가면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늦더라도 하면 그래도 뭐라도 남으니까.
2022년이 찾아온 것이 유난히 기뻤다. 새해를 반기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다가오는 새해를 이렇게 기다렸던 것은 작년이 유독 힘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매일매일이 벅찼고, 12월에 발표된 브런치 공모전에서 탈락하자 더 이상 2021년에 남은 기대도 없어 그냥 눈 감았다가 뜨면 2021년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했다.
한국에는 '아홉수'라는 말이 있다. 특히 29살에 힘든 일이 많이 겹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긴다.
처음에는 아홉수란 거 있을 리 없잖아 생각했다. 사람이 저마다 얼마나 다양한데 단지 나이에 9라는 숫자가 있어서 악재가 공통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일까? 게다가 정작 나의 29살은 아주 평탄히 지나갔다.
그런데 정말 유난히 힘들었던 서른 살을 겪고 나니, 내가 생일이 12월이라 만 나이에 맞춰 아홉수가 뒤늦게 찾아온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아홉수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아홉수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모두가 거쳐가는 과정이고, 일 년만 버티면 그다음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홉수라는 말이 빈번하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29살이 취업, 이직, 승진, 결혼 등 생애 주기에 있어 여러 굵직한 이벤트들이 발생하는 변화의 시기라 힘든 경험을 공통적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힘들었던 이유 또한 크게 보면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일단 첫 번째 고난은 일에서 왔다. 여러모로 우리 회사의 비즈니스도 나의 역할에도 변화가 있었다. 변화의 시기에서는 그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기에 준비된 상태에서 계획대로 착착 실행을 하는 일 머리보다는, 닥친 일을 해나가며 배우고 개선하는 빠른 적응력과 실행력이 필요하다.
국내 시장 대상으로만 마케팅을 하다가, 내가 익숙하지 않은 해외 시장을 타깃으로 마케팅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업무 상의 이 변화가 한동안 적응이 안 되고 그래서 놓치는 것도 많았다. 입사 후 1년 동안은 운이 좋게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조직에서 인정을 받는 것에 익숙했는데, 업무 스콥이 바뀌고, 기대하는 성과가 높아진 상황에서는 매일매일 단두대에 올라가 있는 듯한 그런 긴장감을 느껴야 했다. 좋은 시절이 이미 다 끝났고, 2021년의 남은 날들이 험난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맡은 실무 외에도 팀장으로서 나의 리더십을 많이 갈고닦는 한 해였다. 콘텐츠 팀의 업무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여러 채용이 있었고, 팀의 사이즈가 커지게 되었다.
3명 팀원을 이끄는 것과 5명을 이끄는 것은 달랐다. 팀원들의 스타일도 제각각이고, 그들이 적응을 잘하고, 의욕적으로 임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를 하고,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솔직하게 피드백을 주고, 성장할 수 있게 적절한 과제를 줘야 했다. 화기애애한 팀 분위기를 조성하면서도 너무 해이해지지 않게 어느 정도의 긴장을 조성할 필요도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나라서, 팀장이라서 자연스레 주어지는 책임과 거리감 때문에 외로움도 많이 느꼈다. 하지만 왕관을 썼다면 오롯이 그 무게는 내가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작년에는 한때 결혼을 꿈꿨던 사람과의 3년간의 길었던 연애를 끝내고, 이후에는 설렘은 느꼈지만 안정적이지 못한 짧은 관계들이 나를 스쳤다.
이십 대의 연애와 삼십 대의 연애는 참 다르다고 느꼈다. 이십 대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는 그 사람만 보였다. 삼십 대에 들어서니 단순 연애가 아니라 결혼까지 고려하여 그 사람을 보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안에 외모, 성격, 직업, 취미, 취향, 가정환경 등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Yes’ or ‘No’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 그 사람의 부족한 점이 채워지기까지 내가 노력하고, 기다려줄 여유란 없다. 서른의 연애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일련의 연애를 거치면서 나는 사랑이 참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내 삶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기 시작할 때는 혼자일 때의 견고했던 내 일상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짧은 관계들을 스치며 감정 소모도 컸고, 일과 재테크 등 개인적인 영역에서의 자기 계발에 소홀해지게 되면서 내 삶의 균형을 많이 잃어버렸다.
12월, 연차를 내고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처럼 감정이 휘몰아치고 복잡했던 2021년을 정리하기 위해 혼자 속초로 여행을 떠났다.
혼자서 여행지를 누비고 다니니, 서울에서는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틈을 비집고 나왔다. 언젠가부터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어떤 힘이 내 삶을 이끌어주기를 바란 것 같다는 생각에 미쳤다. 내 삶에 재밌는 일들이 너무 없다고 느껴졌다.
대체 왜일까? 그건 내가 그동안 부지런히 씨앗을 뿌리지 않았기 때문에, 거둬들인 것도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코로나를 핑계로 외부와 단절을 한채 세상에 내 영향력을 끼칠 씨앗들을 심지 않았다.
2022년에는 나를 감싸고 있던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 나중에 어떻게 수확할지 모르는 씨앗을 많이 찍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과 사랑, 힘들었던 순간의 존재감이 워낙 커서 2021년이 전체적으로 암울하게 느껴졌지만 사실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찬찬히 돌아보면 LP, 필름 카메라 사진 찍기, 폴댄스 등 새로운 취미를 즐기면서 삶을 다채롭게 즐겼고 서른 살 기념 바디 프로필이라는 도전도 이뤄냈다.
코로나로 인해 여전히 해외여행을 못가는 대신 전국 이곳저곳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영감을 불어 일으키는 공간들을 경험했고, 닮고 싶은 어른들을 만났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기에 당장의 오늘에만 집중해서 살아왔는데, 5년 뒤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5년 뒤에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신한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 2021년을 떠나보내며 아쉬웠던 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해를 만들고 싶다.
2022년은 부디 작년보다 덜 힘들게, 더 부드럽게 내게 다가와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