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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쇤 Nov 06. 2021

내가 죽고나면 뭐가 남을까

할머니를 떠나보내며 깨달은 것들

날씨 좋은 가을날, 할머니가 먼 곳으로 떠나셨다. 91년의 인생, 그중 5년을 병상에서 보내셨던지라 나를 포함한 가족들은 충격과 격한 슬픔 대신 잔잔한 슬픔을 머금으며 할머니를 보내 드렸다.


아빠로부터 할머니가 숨을 거두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출근한 지 두 시간 만에 짐을 챙겨서 사무실을 급히 나왔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할머니와의 추억을 끄집어냈다.


새로 산 옷을 입고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또 옷 샀냐고' 잔소리하셔서 원래 있던 옷이라고 거짓말로 자주 둘러댔던 일, 동네 노인정에서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들과 고스톱을 치는 것을 구경한 일 등 빛바랜 일상 속의 소소한 추억들이 떠올랐다.  

 

막상 떠올려보니 할머니와 불과 몇 백 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년 시절과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할머니와 함께했던 추억이 많이 없었다. 내가 어렸을 적 비교적 팽팽한 피부와 건강한 모습의 할머니보다 "둘째 손녀딸(=나)이 시집가는 모습은 보고 눈을 감아야 하는데..."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시는 주름과 검버섯으로 얼룩진 피부를 가진 최근의 할머니 모습만 기억에 남았다.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한 할머니보다 15년 전 세상을 먼저 떠나셨던 할아버지와의 기억이 더 선명했다. 집에 있다가 할아버지에게 전화가 오면, 총총총 큰집으로 달려가 엎드린 할아버지의 등에 올라 자그마한 발로 등을 밟아드렸다. 어린 손녀딸의 마사지가 끝나면 할아버지는 수고했다며 고사리 같은 손에 꼭 용돈을 쥐어 주셨다. 할아버지는 경기도 시흥에서만 태어나고 자란 나와 오빠를 바쁜 부모님 대신 서울로 데리고 가주셨는데, 63 빌딩 아쿠아리움과 인천 수봉공원(그때는 놀이기구가 있는 테마파크였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기억이 앨범 속의 필름 카메라 사진처럼 오래오래 남았다.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하며 즐거웠던 추억이 더 많았던 것이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주말에 본가에 내려갔을 때 잠깐 큰집에 들러서 할머니를 뵈었다. 귀가 잘 안 들리시는 할머니를 위해 큰 소리로 "할머니 나 왔어!"를 외치며 주무시던 할머니를 깨웠다. 앓고 계시던 치매끼로 인해 의미 있는 대화가 불가능해진지 오래였다. 건성으로 말을 주고받으며 10분도 머무르지 않고 자리를 떴었다. 그런데 그게 살아 있는 할머니를 마주한 마지막 순간이었다니.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따뜻하게 꼭 잡아 드릴걸...' 후회가 밀려들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얌전히 놓인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보니, 할머니가 진짜 떠나셨다는 것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이제 다시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할머니를 뵙고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슬픔이 벅차올랐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이 슬픈 이유는 누군가의 존재가 소멸되고, 아무리 노력해도 영영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은 뒤에 이름을 남기거나, 재산 또는 빚을 남길 수도 있지만 결국 남길 수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하고 오래가는 것은 ‘추억’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고인에게 닿을 수는 없지만 이 세상에 남겨진 자들은 서로가 공유한 추억으로 고인을 잊지 않고 떠올릴 수 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더라도, 시간과 경험을 함께 공유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빛바래져도 선명하게 오래 살아 있을 수 있다.


내가 언제 세상을 떠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나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과 추억을 많이 남기고, 누군가 날 떠올렸을 때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편안하게, 할아버지 다시 만나서 행복하기를 바라요.


Photo by Laura Fuhrm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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