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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쇤 Dec 17. 2023

베푼 만큼 돌아오는 친절의 미학

feat. 인류애 뿜뿜 솟게 만드는 아이폰 에어드롭 기능 활용법

각자 조금씩 친절을 베풀면 전체적으로 우리가 사회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삶의 신조까지는 아니지만 평소에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주차장에 진입하려고 대기하려고 줄 선 차량의 행렬에 얌체같이 앞에서 끼어드는 차, 지하철에서 하차할 승객이 먼저 내리지 않았는데도 앉을자리를 차지하려고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오는 아줌마 등 일상생활에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을 종종 겪는다.


그럴 때는 나도 똑같이 응수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나는 옳은 행동을 하며 주변에 친절을 베풀자고 마음을 굳게 먹는다. 내가 이렇게 베풀면 언젠가는 나에게, 내 지인들에게, 그리고 사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친절이 퍼져갈 것이라 믿으며.  


그리고 최근에 ‘친절을 베풀면 친절로 되돌아온다 ‘는 나의 믿음이 선명하게 입증된 일이 생겼다.




얼마 전 제주도에 여행 갔을 때의 일이다. 아담하지만 통유리창으로 협재의 해변을 시원하게 담아낸 뷰가 인상적인 공간이었다. 창가에 마련된 자리가 이른바 명당이었고, 역시 인기가 많았다. 오픈 시간에 맞춰 간 덕분에 나도 운 좋게 창가 좌석 중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카페 내부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는데 반대편 창가 자리에 앉은 친구로 보이는 여성 두 명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내가 의도한 피사체는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였는데 그 앞에 떡하니 자리 잡은 이들의 존재가 약간 방해가 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순간 '저분들은 둘이서 함께 있는 뒷모습을 본 적이 없겠지?'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여행 내내 찍었던 사진 속에는 서로가 찍어준 각자의 모습만 담겼을 테다. 여행 중 기억에 남을만한 추억을 선사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한 편에는 누군가 나와 남자친구의 모습도 이렇게 예쁘게 담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내심 있었다.  


그래서 1-2분 정도 예쁜 구도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때 마침 오른쪽에 앉은 여성 분이 친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나는 '이거다!' 싶어 셔터를 연신 눌렀다.



우연히 찍어버린 사진이었다면 건네주는 것도 쭈뼛쭈뼛 했겠지만 나는 의도했던 바대로 결과물을 얻었기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큼 다가가 물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핸드폰이 아이폰이에요? 제가 두 분 뒷모습 사진을 찍었는데 너무 예쁘게 나와서 공유해 드리고 싶어서요"


처음에는 아이폰이 있냐고 물었을 때는 잔뜩 경계하던 눈빛이 내가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금세 풀리며 입가에는 미소가 피었다. 전화번호를 굳이 교환하지 않고도 깔끔하게 사진만 주고받을 수 있는 에어드롭의 기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온 산타처럼 만족스럽게 자리로 돌아와 책을 읽었다.


한 십 분쯤 지났을까 "저도 두 분 사진 찍어드릴까요?" 누가 말을 걸어 뒤돌아보니 아까 사진을 찍어드렸던 여성 분이었다.


와! 이렇게 빨리 보은을 받을 줄은 몰랐다.


나는 하나의 구도에서 찍은 2장의 사진을 전달해 드렸는데, 여러 구도에서 정성스럽게 찍은 여러 장의 사진으로 보답받았다. 인류애가 꽃 피는 순간이었다. 각자도생, 살기 팍팍해져 가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따뜻한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다.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마침 그 카페에서 읽고 있는 책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였다. 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 분석학자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2차 세계대전 중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생존자다.


생존을 다투는 극한의 환경에 놓이게 되면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 그는 식욕, 수면욕 등 본능적인 욕구가 철저히 결핍된 환경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간의 민낯을 관찰했다.


어떻게든 본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다른 수용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한 사람도 있었고 살가죽이 뼈에 둘러붙은 굶주린 상태에서도 배급받은 빵을 타인에게 양보하는 선한 사람도 있었다.

 

선한 사람이 될지, 악한 사람이 될지는 결국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는 인간은 몸뚱이 빼고 모든 걸 다 빼앗긴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정신적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라고 결론지었다.


강제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인간의 영혼을 파헤치고, 그 영혼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간성에서도 선과 악의 혼합이라는 인간 본연의 특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층은 아주 심오한 곳까지 이르러 인간성의 바닥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강제 수용소리는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으며, 고매한 인격을 가진 부류와 미천한 인격을 가진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들은 사회 모든 집단에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배웠던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 사상이 떠올랐다.


세상을 선과 악 이분법적으로 맹자와 순자 둘 다 틀렸다. 선과 악은 공존하며 어떻게 발현될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다정한 개인들이 선을 베풀고, 선을 경험한 경험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더 따뜻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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