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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쇤 Sep 29. 2024

부츠 대신 풋살화를 신을 결심

여름 내내 몸을 쳐지게 했던 습기가 사라지고,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온수로 하는 샤워가 너무나 좋고, 아아보다는 따아가 슬슬 땅기기 시작하는 때 예쁜 가을옷이 그렇게 사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즐겨 찾는 단골 쇼핑몰에 업로드된 신상 제품을 구경하는데, 코디 컷마다 꼭 빠지지 않는 아이템이 있으니. 바로 부츠다. 원피스든, 스커트든 바지든 무릎 바로 아래나 중간까지 오는 검정색 롱부츠를 신으면, 페미닌 하면서도 동시에 간지 나 보이는 매직이 있다. 패션의 완성은 부츠라고나 할까?


그런데 내게 부츠는 살짝 그림의 떡이다. 체구 대비 너무나 단단한 종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튼튼한 종아리는 어렸을 때부터 쭉 이어져 온 나의 콤플렉스다. 자연스럽게 옷을 입을 때도 스커트보다는 바지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런데 키는 중학교 때 이후로 성장을 멈췄는데, 이놈의 종아리 근육은 서른 살이 넘은 지금도 나날로 성장 중이다. 특히 2년 전 풋살을 시작한 뒤로 산술급수적 속도로 종아리 알이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시즌에 2~3번은 스커트를 입긴 했는데, 풋살을 시작한 뒤로는 옷장 속에 고이 넣어두고 아예 꺼내보지도 않는 날이 압도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어쩌다 한 번 신을까 말까 하는 현실과는 별개로 그래도 부츠에 대한 미련은 버릴 수가 없었나 보다. 라이브 쇼핑을 보다가 충동적으로 화이트 컬러의 미들 부츠를 질러버렸다. 검은색 대비 흰색 부츠는 상대적 레어템이라서 포인트로 신어주면 너무 간지 나 보일 것 같았고, 딱 봤을 때 통이 여유로워 보여서 저 정도면 내 종아리도 충분히 소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걸었다.


얼마 뒤 주문했던 미들부츠가 도착했다. 마침 풋살을 하고 늦은 밤 귀가했을 때였다. 가방만 허겁지겁 내려두고 운동복 그대로 입은 채로 바로 부츠를 신어봤다. 그러나 왜 항상 불길한 예감은 빗겨나가지 않는 것 인가. 모델이 신은 모습을 보면 부츠가 종아리를 감싸고도 통이 여유롭게 남던데, 내 다리는 스키니진처럼 착 달라붙어 여유라고는 1도 없었다. 정강이 중간까지만 오는 부츠 위로 솟아오른 내 종아리 알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마치 통나무 2개가 부츠 속에 꽂혀 있는 것 같았달까.


기대했던 라인이 연출되지 않더라도 환불 배송비 5천 원 내는 게 아까우니 그냥 신을 것인가, 아니면 깨끗이 포기할 것인가. 곰곰이 고민하다가 환불을 결정했다. 사실 이건 되게 의미심장한 선택이었는데 단순 환불 결정이 아니라, '이제 내 인생에서 미들 부츠는 없다'는 포기 선언과 같았기 때문이다.


풋살을 좋아하고 자주 하게 되면서 피부는 새까맣게 그을리고 종아리 근육은 두꺼워져만 간다. 즉, 한국에서 이상적으로 그려지는 미의 기준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풋살을 더 잘할 수만 있게 된다면, 일부 미의 기준은 기꺼이 불충족해도 좋다고 쿨하게 여기는 걸 보면 풋살이 삶에서 중요한 일부가 되었나 보다.  




착잡한 마음으로 부츠를 신은채 찬찬히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똑같아 보였던 내 양쪽 다리의 미세한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왼쪽 다리 알이 오른쪽보다 더 볼록 튀어나온 것이 아닌가. 인바디를 쟀는데 정말 왼다리의 근육의 무게가 더 나갔다. 물론 아주 근소한 작은 차이긴 했지만.


보통 많이 쓰는 부위의 근육이 발달하는 법이다. '그런데 나는 오른발 잡이인데, 왜 오른쪽 다리가 아니라 왼다리의 근육이 더 많은 거지?' 의아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기본기 훈련을 하면서 깨달았다. 드리블, 슈팅, 패스를 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왼 다리에 정말 많은 힘을 주고 있었다.


오른발은 볼을 컨트롤하느라 땅에서 떠 있기 때문에 디딤발 역할을 하는 왼 다리의 역할이 중요하다. 패스와 슈팅의 정확도를 높이고, 힘을 실는 것은 왼다리가 몸의 중심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버텨주는지에 따라 달려있다. 역시나 자극을 많이 받은 부위에 근육이 생기고 단단해지기 마련인 것이다.


눈에 선명히 보이지는 않지만 회사 생활을 할 때 필요한 능력과 스킬에도 근육처럼 편차가 존재하는 것 같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나는 모든 부분에서 완벽할 필요는 없고, 두루두루 이것저것 다 잘하는 것보다 어느 하나를 특출 나게 잘해서 대체 불가능한 수준인 것이 더 경쟁력 있다고 생각했던 편이었다. 그래서 주니어 마케터 시절, 퍼포먼스 마케팅이 대세였을 때도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콘텐츠 마케팅을 남들보다 월등하게 잘해버리자고 마음을 먹고 퍼포먼스 마케팅 분야는 기웃거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의 편차는 실무자일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맡은 역할이 리더라면 판단의 기준은 달라진다. 필요한 능력치가 완벽한 육각형을 그리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어느 하나도 기준에 미달하지는 못하는 수준으로 가꿔야 한다.


6년 차 직장인으로 실무자에서 중간 관리자로 슬슬 넘어가는 시기인 지금 약한 부위가 더 발달할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자극을 많이 줘야 할 때라고 강력하게 느끼고 있다. 얼마 전 대표님과 면담을 하면서 내가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소의적인 마케팅 영역에 내 업무의 범위를 국한해서는 안된다는 피드백을 들었다. 비즈니스, 숫자, 매출과 연계된 시각으로 마케팅을 바라볼 것을 주문받았다. 콘텐츠 마케팅을 통해 이뤄낸 매출 성과보다는, 콘텐츠 마케팅 자체의 활동에만 신경 써왔던 나였기에, 숫자와 연관 지어 일을 바라보는 건 항상 약하다고 느끼던 부분이었다.


축구 선수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씨는 주발이 아닌 왼발의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 훈련할 때 오른발 축구화에 압정을 꽂아놨다고 한다. 평소의 습관대로 오른발로 슈팅을 해서 압정이 발에 꽂히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는데 그런 트라우마를 겪은 뒤에는 어떻게든 의식해서 왼발로 슈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손흥민 선수를 훈련시킬 때도 무조건 왼발부터 축구화를 신고, 훈련을 할 때도 왼발부터 시켰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발달이 부족한 부위의 근육을 어떻게 발달시켜야 할지 막막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아직 책임을 지는 리더 자리가 아니니, 압정까지 꽂으며 나를 극한으로 몰아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부족한 점을 숨기는 데 급급하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고 자극을 의식적으로 주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단단한 잔근육이 생길 것이라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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