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여행 이야기
작년 11월, 그러니까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 핀란드 헬싱키 해외 출장의 기회가 왔다. 전 세계 최대 규모의 스타트업 축제인 Slush(슬러쉬)에 참가하여 우리 회사의 서비스를 홍보하는 일이었다. 슬러쉬는 첫 직장인 민간 스타트업 지원기관에 입사했던 순간부터 정말 꼭 가보고 싶었던 축제였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진 것보다 더 기뻤던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바로 핀란드 바로 아래에 위치한 에스토니아(Estonia)를 다시 찾을 기회가 왔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13년의 겨울부터 여름, 나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n)에서 교환 학기를 보냈다.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는 포르투갈 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의사이자 작가인 천재 '아마데우 프라두'의 입을 빌어 주옥같은 문장이 많이 나오는데, 아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우린 우리의 일부를 남기고 떠난다. 그저 공간을 떠날 뿐, 떠나더라도 우린 그곳에 남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야만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우리 안에 남는다.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장소로 갈 때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도 시작된다. 그 여정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
7년 전, 에스토니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나의 어떤 일부가 그곳에 남았을까 궁금해졌다. 다시 그곳에 가면 나의 어떤 것을 찾을 수 있을까.
에스토니아는 북유럽의 발트해 연안에 자리 잡은 130만 인구(대전 인구수 147만 명)를 가진 작은 나라이다. 함께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묶여 발트 3국으로 유명하다. 오랜 기간 동안 독일 및 러시아의 침략 및 지배를 당한 아픈 역사를 가진 점에서는 어느 정도 우리나라와 공유하는 점이 있다.
지금이야 유럽 여행이 워낙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에스토니아'라는 나라를 들으면 아는 사람들이 꽤 많은 편이다. 그런데 7년 전인 2013년만 해도 한국 사람들에게 에스토니아는 정말 멀고 낯선 나라였다. 교환학생 서류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학교와 교류를 맺고 있는 전 세계의 대학교의 리스트 중에서 나의 전공 수업 유무, 지리적 위치 등의 여건을 따져 1-3순위를 적어야 했는데, 길게 늘어진 목록 속에서 에스토니아라는 나라가 눈에 띄었다. 바로 구글에 Estonia를 검색해봤다. 검색창 결과에 중세 시대의 유럽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탈린의 올드타운 이미지가 가득 찼다.
'아니? 이렇게 멋진 나라가 지구 상에 존재했단 말이야?'
단 번에 에스토니아는 내 마음속의 1순위로 등극했다. 찾아보니 탈린대학교에 내 전공 수업도 많이 열리고 있어 학점 인정을 받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선택지였다.
에스토니아에서 생활하는 6개월 동안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들이 참 많았다. 운 좋게도 화요일 오후부터 목요일까지만 수업이 있는 강의 시간표를 짠 덕에, 학기 중에도 미친 듯이 많은 유럽의 나라들을 여행했고, 서류 준비 부족으로 단기 거주 비자 취득에 한 번 떨어지는 바람에 추방당해서 한국으로 돌아가야하는 상황이 올까봐 두려움에 떨기도 했으며, 난생처음 보는 외국인들에게 둘러싸여 나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1월부터 5월까지 눈이 오는 길고 긴 겨울을 경험했는데, 반면 자정이 넘은 시각까지 밝았던 여름의 백야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에스토니아에서의 6개월이 그 이후 내 인생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때 본 것, 먹은 것, 알게 된 것 등이 처음인 게 많아 모든 경험이 크고 깊게 느껴졌다. 유럽에서 보낸 교환학기의 경험이 너무 좋았던 나머지 욕심을 부려서 2년 뒤 독일에서 2번째 교환학기를 보냈는데, 이때는 교환학생의 일상이 이미 에스토니아에서 경험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런지 새로 마주하는 것들에 그렇게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시간으로만 따지면 독일에서의 경험이 더 최근이지만, 내게는 에스토니아에서의 기억이 더 크고 풍부하게 남았다.
7년 전에는 비행기를 타고 에스토니아에 도착했는데, 이번에는 핀란드에서 출발한 배를 타고 색다르게 탈린의 땅을 밟았다. 터미널 밖으로 나가 처음으로 들이마신 공기가 차가웠다. 핀란드로부터 배로 두 시간 떨어진 거리에 있고, 위도상으로는 에스토니아가 더 남쪽인데, 체감상 핀란드보다 에스토니아가 더 추웠다.
도착하자마자 탈린에 거주하는 한인 S를 만났다. S는 2013년 당시에 한인 식당을 운영하셔서 알게 되었는데, 한 두 번 뵈었을 뿐 깊게 교류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SNS를 통해서 꾸준히 서로의 일상을 지켜봤기에 마음 한편에 왠지 모를 친밀감이 자리 잡고 있었고, 탈린행 페리 티켓을 끊자마자 바로 연락을 취했다. 폐공장 지대에 카페 및 Bar들이 들어서 인기를 얻고 있는 탈린의 힙한 지역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S와 S의 에스토니아인 와이프 M과 주로 유럽과 한국 문화의 차이점을 주제로 대화를 즐겁게 나누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는 에스토니아에서 한때 내가 존재했다는 것을 유일하게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뭔가 안심이 되는 마음이 들었다.
긴 식사를 마치고 저녁 7시에는 다시 헬싱키로 돌아가는 배를 타야 했기에, 서둘러 올드타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올드타운은 내가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긴 그 오랜 시간 이 모습을 보존해왔는데, 지난 몇 년 동안 드라마틱하게 변했을 리는 없었다. 그때와 다른 건 올드타운의 중심 타운스퀘어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있었다. 2013년 내가 에스토니아 도착했을 때는 이미 크리스마스 마켓은 끝난 뒤였어서 아쉬웠었는데 이렇게 직접 볼 수 있어 기뻤다.
지도 없이 순전히 7년 전의 내 기억에 의존하여 추억이 담긴 골목을 찾아 걷다 보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났다. 해는 이미 지고, 핀란드 헬싱키로 돌아가는 페리를 타기 전 에스토니아에서 유명한 kalev 초콜릿을 사기 위해 올드타운 근처에 있는 솔라리스(Solaris) 몰에 갔다.
솔라리스에 들어선 순간, 그 몰에 자주 드나들며 가방과 옷을 구매했던 어린 날의 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몰의 또 다른 곳에는 에스토니아의 슈퍼마켓에서 한국의 고추장을 파는 것을 신기해하며, 인증 사진을 찍어 주변 친구들에게 자랑하던 나의 모습이 있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서는 6개월간 머물렀던 Karu 기숙사도 찾아가 봤다. 한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날락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되어 있었다. 투박한 외관의 회색빛 건물이 어둠 속에 유난히 거대해 보였다.
기숙사에서 탈린대학교는 도보로 10분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 당시의 등교 길을 걷는데 익숙한 ATM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는 잦은 여행을 다니느라 항상 용돈이 부족하여 송구한 마음으로 부모님께 자주 용돈을 부쳐 달라는 부탁을 했던 나, 원화-유로화 환전 수수료 때문에 통장에 들어온 돈보다 손에 쥔 돈을 항상 부족하게 느꼈던 철없고 어린 날의 내 모습이 있었다.
7년 만에 다시 방문한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옛날 나의 자취를 따라가 보니, 22살의 열정 넘치지만 서툰 모습 투성이의 어린 내가 보였다. 그때에 비교하면 지난 세월은 나를 더 여유있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 같다고 느꼈다.
오랜 시간 내 기억 속에서만 여행했던 꿈같은 곳을 다시 오게 되어 내딛는 발걸음 걸음마다 벅찰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사실 올드타운을 구경할 때만 해도 생각보다 담담한 내 모습에 놀랐었다. 그 시절의 추억이 담긴 내 일상의 공간을 방문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정든 장소에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그 장소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그 장소에 깃든 세부적인 추억을 불러내 마주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라고.
에스토니아에서 발견한 또 한 가지 신기한 점은 7년 전과 비교하여 나 자신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느낀 것이었다. 22살의 어린 나이에는 서른을 앞둔 20대 후반의 나를 상상하는 것이 힘들었다. 미래란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기에 미래의 나를 그리기 힘들었고, 더 이상 청춘이 아닌 나이 든 내 모습을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런데 막상 나이가 들어보니 외적으로는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수 없더라도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향한 열정, 내적으로 나를 구성하면서, 동시에 나를 움직이는 동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고 느꼈다.
또 다른 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다시 이곳에 방문해도 탈린은 여전히 탈린의 모습을 간직하고, 나 또한 서른 중반의 나이가 되겠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 여전히 나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