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보내는 소소한 일상이 주는 행복함
2020년을 강타했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COVID-19로 인해 나는 완벽한 집순이가 되어버렸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캘린더를 빼곡히 채웠던 수많은 약속을 위해 강북, 강남을 휘젓고 다니던 나였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및 방역 수칙이 강력해질 때마다, 사적 모임은 이에 반비례하여 줄어들었고, 그 후 나의 스케줄은 평일 및 주말에 약속이 1개 있을까 말까 한 상태가 되었다.
처음에는 퇴근 후 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이 어색했다. 왠지 모를 공허함을 와인, 맥주, 위스키 등 각종 술을 홀짝이며 취기로 채우곤 했다. 하지만 곧 이런 조용한 일상에도 완벽히 적응했고, 이제는 집에서 편히 쉬는 일상이 너무 당연한 것이 되어 괜한 약속을 만들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내가 180도 바뀐 일상에 순탄하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의 8할은 작년 3월에 이사한 집 덕분이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바로 앞에 위치한 이 집은 전용 면적 8평, 엄청 크지는 않지만 혼자 살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크기의 원룸이다. 내가 가장 자랑하는 우리 집의 매력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다. 바로 앞으로는 초등학교 울타리 안에 심어진 울창한 푸른 나무가 눈을 즐겁게 하고, 저 너머에는 고층 아파트 단지가 이루는 스카이라인이 보인다. 창이 남쪽으로로 나 있어 오후에는 따뜻한 햇살이 집안 가득 들어온다. 노을질 무렵의 환상적인 하늘과 고도를 낮추고 김포공항 쪽으로 향하는 비행기의 움직임을 넋 놓고 바라볼 때가 많다.
어떻게 보면 새로 이사한 집에서 누릴 수 있게 된 사치는 내가 사는 원룸 건물이 초등학교가 바로 앞에 위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거쳐갔던 집들은 반지하이거나, 대학가 술집이 밀집한 골목에 위치하여 한 번도 창을 활짝 열고 창밖 풍경을 마음껏 누린 적이 없었다. 이외에도 초등학교 근처에 살면 치안이 조금 더 좋고, 쌩쌩 지나다니는 자동차들도 별로 없다는 소소한 장점이 있다.
이 집에 이사하면서부터 생긴 루틴과 취미 5가지가 있다. 누구나 마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 거창한 취미는 아니지만, 큰돈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일상의 소소한 행복함을 확실하게 더해줄 수 있는 방법이다.
매일 아침을 운동으로 시작한다. 졸린 눈을 비비며 요가 매트를 깔고, 5분 명상으로 정신을 맑게 한 후 밤새 굳은 몸을 풀어주는 스트레칭과 코어 근육을 자극하는 운동을 15분 정도 가볍게 한다. 주말에는 유산소 운동과 더 강력한 복근 운동 세트를 약 한 시간 정도 한다.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것을 몹시 지루해하여 등산과 러닝 등 야외 운동을 선호하는 나이지만, 현재의 집 근처에는 딱히 뛸 수 있는 하천 및 공원이 없어 집에서 운동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가 되어버렸다. 거창하지 않게 하루 딱 15분이라는 소소한 목표를 설정하니, 매일매일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하루가 지날수록 탄탄해지는 복근을 느끼는 뿌듯함은 덤이다.
출근 전 독서와 커피는 약 1년 전 10시가 출근 시간인 현재의 직장으로 이직하면서부터 생긴 습관이다. 9시 출근이었을 때는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출근하는 것만으로 벅찼는데, 출근 시간이 한 시간 뒤로 미뤄지니 아침 식사도 챙겨 먹고 생산적인 무언가를 할 여유가 생겼다. 에스프레소 커피의 강렬한 맛보다는 연하면서도 적당한 산미가 느껴지는 커피의 맛이 좋아 매일 핸드드립 커피를 내린다. 따뜻한 빵과 커피로 든든하게 허기를 채우며 책을 읽고 있으면 에너지가 거의 100% 만땅 충전되는 것이 느껴진다. 아무리 분주한 아침이더라도 이 10분의 여유를 가지는 것은 그날을 특별하고 성공적인 날로 만들기 위한 중요한 의식이다. 이렇게 하루에 10분씩 책을 읽으면 한 달에 2-3권 정도는 거뜬히 끝낼 수 있다.
자취 생활 3년, 이것저것 시도하며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여 웬만한 한식과 양식 메뉴는 거뜬히 할 수 있는 솜씨를 키우게 되었다. 나에게 요리는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한데, 요리에 쓰일 채소를 씻고 자르고,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지글지글 볶다 보면 스트레스가 절로 해소된다. 손 닿는 곳마다 뭔가 깨지거나 쏟아지는 엄청난 마이너스의 손을 가지고 있어 가끔 요리는 스트레스의 원흉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예쁘게 플레이팅 한 음식을 감성 있게 담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진정한 요리 완성(인스타그램이 없었더라면 요리를 이렇게 자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배달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요리를 자주 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다. 배달 앱에 들어가 수많은 메뉴 중 어떤 것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부터 고통이고, 약간 식어 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실망감, 먹고 난 뒤의 플라스틱 처리 등 나에게는 편리함보다는 스트레스가 더 큰 행위다.
혼술은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생긴 새로운 취미이다. 술 약속이 거의 사라지자 집에서 혼자 와인 및 위스키를 마시며 기분 좋은 알딸딸함을 느끼는 날의 빈도수가 늘었다. 마치 출근 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당기듯이 퇴근 후 본능적으로 저녁 식사하면서 반주로 와인 한 잔 하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다. 내가 즐기는 다른 취미들과 달리 혼술은 순기능과 역기능이 매우 뚜렷하다. 퇴근 후 집에 와서 느끼는 긴 밤의 적막함과 무력함을 달래주고, 진도가 나가지 않던 글이 갑자기 술술 잘 써지는 마법의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역기능은 알딸딸함이 적정 수위를 넘으면 곧바로 잠 기운이 몰려든다는 것.
아무래도 혼자 사는 집에 TV도 없다 보니 혼자 있을 때의 그 적막함이 싫어 집에 있을 때 나의 스피커는 항상 열일을 한다. 우울했다가도 신남으로, 신났다가도 차분함으로, 단 번에 무드의 전환을 만들어내는 음악의 힘은 놀랍다. 최근에는 턴테이블을 구매하여, LP를 수집하는 재미를 보고 있다.
2016년에 했던 아프리카 봉사활동 경험을 풀어낸 브런치 글 한국에 돌아가기 싫어 에서 아래와 같은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집이란 가격, 직장과의 거리 등 여러 제약으로 인해 나의 선택권 없이 반강제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면서도 조금 욕심을 부려서라도 '나는 이런 곳에서 살고 말겠다'라는 지향점을 투영해야 하는 것이기도 한 것 같다. 집이란 단순히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공간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확실히 작년 3월 이사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이 집은 현재의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요가 매트 깔 자리도 없는 좁은 집에 살았다면, 과연 지금처럼 매일 홈트를 할 수 있었을까. 채광이 잘 되지 않는 어두운 집에 살았다면, 과연 지금처럼 핸드드립 커피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즐거움을 자주 누릴 수 있었을까.
집은 바쁜 일상 속 잠을 자고 끼니를 때우기 위해 잠깐 거쳐가는 곳이 아닌, 더 나은 하루를 꿈꾸며 나의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