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 데미안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이 문장은 데미안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조차 자주 회자되는 구절이다. 그러나 으레 많은 명언이 그렇듯, 원작의 맥락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오용되는 경우가 많다.
군대에 처음 갔을 때, 나의 맞선임은 어리버리하던 나를 날마다 다그치며 이런 식으로 말했다.
“적응해! 알을 깨고 나오란 말이야. 싸제에서 벗어나 군대에 널 맞춰!”
하지만 데미안을 읽어보니, 저런 식의 ‘적응’을 강요하는 말은 이 구절의 본래 의미와 정반대에 가까웠다. 오히려 데미안의 메시지는 모범과 규율을 강제하는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에게 절실한 말이었다.
세상은 인간에게 항상 모범과 규율을 요구한다. 그 생명권력의 시작점은 학교다. 인간만큼 개성이 강한 동물도 드물다. 그런데 학교는 이 다채로운 존재들을 한 공간에 몰아넣고, 획일화를 시도한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수많은 가스라이팅과 무의식적 폭력을 거치며 조정된 존재가 된다.
사회는 겉으론 개성을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조직에게 있어 개성만큼 불필요한 것도 없다. 어른들은 늘 혁신을 외친다. 그러나 정말로 혁신하는 조직은 백에 하나 있을까 말까다. 수십 년간 비혁신이 정론이었는데, 갑자기 세계관이 바뀌었다고 스스로를 바꾸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데미안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기묘하게 해석한다. 원래는 지탄받아야 할 인물인 카인을, 오히려 비범한 존재로 해석한다. 이 이야기를 주인공이 아버지에게 전하자, 아버지는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며 단호히 말린다. ‘특이한 생각’은 곧 불경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젊은 시절의 방황은 일시적인 통과의례라고 여긴다. 그러다 30대가 되어 가정을 꾸리는 시점이 오면, 이제는 직급과 직책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적 성공과 개인적 안녕은 언제부턴가 동의어가 되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방황은 특정 시기의 특권이 아니다. 방황은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철이 드는 것도 아니고, 어리다고 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어떤 날은 성자처럼 숭고하다가, 다음 날은 천둥벌거숭이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모범이라는 기준으로 포섭되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유동적인 존재다.
데미안은 규범에서 탈락했거나 탈주하려는 이들에게 정당화의 논리를 제공한다.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불량 청소년들이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할 때, 그 집단에는 종종 영적 지도자 혹은 ‘구루’ 역할을 하는 인물이 나타난다. 기성 사회에서 이탈한 삶은 때때로 불법과 탈법의 경계에 서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기계적인 삶에 지쳐 있던 이들이 고전명작 100선 같은 데서 데미안을 꺼내 들고 단숨에 테러리스트가 되는 일은 드물다. 현실에서의 실천은 대부분 훨씬 더 소소하다. 기껏해야 “아, 이번 주는 부장님이랑 등산 가는 걸 단호하게 거절해야지” 수준이 아닐까.
외부 세계의 인정은 때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인정을 받기 위해 나의 내부 세계를 망가뜨리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역할극에 몰입을 하게 되어 내외합일의 경지(?)에 슬프게도 이르려고 한다. 그러니 이를 깨어날 실천을 해야 한다.
실천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실천의 시작과 끝은 결국 ‘인지’다. 문제 상황을 인식하는 순간, 이미 저항은 시작된 것이다. 세상에 단번에 바뀌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인가를 인지한다는 것은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싱클레어도 크로머의 학폭을 인지하여 데미안과 상담하였고 결국 크로머를 쫓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