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정제글출하과정개요
나는 미래가 안 보여도 글을 쓰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 다시,
나는 미래가 안 보이기에 글을 쓰는 사람을 좋아한다.
조지 오웰, 솔제니친, 그람시 등등. 인간은 상상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상상을 이루는 첫 단추는 보통 글을 써서 시작된다.
2020년, 귀여운 수준의 글을 써서 학내 문학상을 받은 기억을 끄집어내본다. 당시 나는 싱가포르 교환학생을 Covid-19로 인해 조기 귀국한 뒤 먹고살 길을 찾는 상황이었다. 수십개의 인턴을 전부 떨어지고 가까스로 최종까지 간 반기문재단도 탈락했다.
'고작 인턴'을 떨어졌다고 말하기에는 사회경험 없는 대학생에게 절망은 꽤 컸다. 가장 큰 문제는 방향성의 상실이다.
모의고사 성적이 안 나왔다? 공부하면 된다. 살이 쪘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식단을 조절하면 된다.
도무지 이 취준이라는건 방향을 못 잡았다. 그때는 그 순간을 열심히 버티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 세상이 나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고 있던 과외도 짤려 멍한 세월을 보낼 때 속에 있는 여러 악하고 역한 감정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지금도 그걸 어떻게 개념화할지 모르겠다.
분노? 증오? 혐오? 질투? 나태? 권태? 우울? 공허?
확실한 건 무언가의 광기가 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다. 문득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부지한테 말했다. 이번 여름방학은 아무것도 안하고 글을 쓰고 싶다고.
"소설의 마침표를 찍어보는 건 인생의 큰 자산이 될거야. 신경쓰지말고 한번 해봐."
어차피 사회적 거리두기로 어디 가지도 못하고, Lockdown 같은 거 없어도 여행 갈 형편도 안 되었다. 오히려 좋다. 이번 방학은 글을 쓰자.
친구들에게 소설을 써보겠다고 했다. 반응은 어떨까? 여러분들도 여러분 주변에 누가 글을 쓰고자 말하고 다니면 무슨 반응을 보일 것 같은가. 높은 확률로 둘 중 하나다.
조롱과 무관심.
응원과 격려를 겉으로는 해주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타인은 권위를 가지지 못한 글 따위에 관심이 없다. 인간은 활자를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인간은 권위에 복종하도록 설계되었다.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글은 화장실에 써져 있는 어지러운 정신이상자의 낙서와 다를 바 없게 취급된다.
그래서 보통은 좌절된다. 내면의 광기를 표출하는 것은 정제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무리 정제해서 출하하더라도, 받아줄 리 만무하다. 평단 및 대중의 품질검사를 거치치 않았으니까. 그래서 먼지만 쌓인 원고 혹은 바이트나 차지하는 글귀로 전락한다.
글을 쓰는 행위는 가장 가성비가 떨어지는 짓거리다. 흔히들 글은 취미로 부업으로 쓰라고 말한다. 나는 저 말에 회의적이다. 그 이유는 글은 취미도 부업도 될 수 없다. 취미라 하기에는 즉각적인 즐거움이 오지도 않는다. 부업이 되버린 글은 적어도 내 기준엔 '글'은 아닌 것 같다.
취미가 뭔지 정의를 하기 전에 스포츠, 요리, 악기 등등은 숙달과 즉각적인 보상이 온다. 반면 글은? 글도 숙달의 영역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주관의 세계라 절대적인 기준이란 없다. 각자가 취미를 어떤 것으로 삼는지는 자유다. 하지만 취미로 삼기에는 세간의 취미라 불리우는 여러 행위와 너무 종류가 다르다.
부업이 되버린 글은 글이 아니라 '문구'다. 개성 없이 써져있는 맛집 블로그 탐방 글에 문학적 가치가 있는가? 상업성이 예술성을 저하시킨다고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웹소설도 순수문학 만큼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핵심은 글로 돈을 벌려면 적어도 영혼을 갈아넣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인형 눈깔 붙이는 정도의 느낌은 확실히 아니다.
글을 왜 쓰는가? 질문이 잘못되었다. 왜 글을 쓸 수밖에 없는가? 로 바꿔보자. 그건 글을 쓰는게 좋기 때문이다. 좋은 음악을 듣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다. 좋은 글에는 그러한 분위기가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다른 것도 잘하는가? 예를 들어 대인관계가 좋고 보고서를 잘 쓰며 분석능력이 있는가. 애석하게도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사회적 위신과 필력은 큰 상관관계는 없다. 그럼에도 이건 확신한다. 글은 인간에게 '강력한 한 방'을 선사한다.
존경하는 마키아벨리 선생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밀려난 3류 정치인이자 왕정에 찍힌 비운의 공화주의자로 그저 그런 인간으로 살아갈 뻔했다. 그러나 왠걸? '군주론'이 공전의 히트를 쳐 시대의 지성인으로 남았다. 이런 케이스는 수도 없이 많다. 단순히 사회적 성공의 발판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글은 무너진 개인을 구원할 통로가 될 때가 많다.
그 이유는, 글은 인간의 의외성을 발굴해주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회사에서 집에 가는 셔틀버스 안에 있다. 셔틀버스를 탈 때만 해도 이런 글을 쓰고 있을 거라 생각도 못했다. 그냥 끄적거리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나? 어찌어찌 살다 보면 도달해 있는 순간이 있다. 안 풀릴수도 잘 풀릴수도 있지만 적어도 예측이 가능하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짜여진 톱니바퀴 안에서 메가머신이 만든 설계도 안이지만 글을 쓰는 나의 상상력은 어디로 튈 지 나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쓴다. 나를 이탈시키기 위해서. 다시 현실로 돌아가 나를 규격에 맞추어야 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나는 자유롭다. 장자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노닐고 노닐고 노닌다(逍遙遊)
미래가 안 보이기에 글을 쓴다. 보이는 미래는 결국 통계의 산물. 경험을 통한 지혜는 고정관념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미래지만 전문가들은 이게 니네 펼쳐진 미래라고 아우성 친다.
니네들은자살률1위국가실업률1위국가부동산값폭등부모보다못사는최초의세대고미중갈등의틈바구니에껴서안보불안도느끼고분단국가에징병제국가이며젠더갈등세대갈등을온몸으로느끼는불쌍한존재로살거시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게 끝이 아니기에, 뽈뽈 뿜어나오는 광기를 정제하고자 조롱과 무관심에도 나는, 나는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끄적거리는 뻘짓이 매일 직면하는 절망을 이겨낼 에너지를 시추하는 시추 시설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