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계 이야기

이성의 세계와 감성의 세계

by 행신

Globalization은 보통 한국어로 ‘세계화’라고들 한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이 번역이 잘못되었다고도 주장한다. 왜냐하면 세계라는 단어는 온 지구가 하나가 되어 교통-통신이 발달한 것과는 별개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제3의 물결이 전 지구를 덮어 국가 간 소통 및 이동이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인류의 ’세계관‘의 통일을 이루어 냈는가? 러시아 사람과 중국 사람과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과 미국 사람이 모두 동일한 정치 체제를 희망하는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The End of the History)‘에서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를 완전히 패퇴시켰으며, 이제 더 이상의 정치 체제는 없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 책을 발간하고 딱 10년 정도 뒤에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 후쿠야마의 주장대로라면 지구 곳곳의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운 교류로 인하여 같은 생각을 가졌어야 한다. 과연 글쎄? 지구는 현재 분열의 연속이다. 그래서 나는, 공적인 자리가 아니면 세계화라는 단어는 가급적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세계화라는 단어를 쓰는 분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세계가 무엇이냐.


세계는 특정 사고방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간주관성’의 집합체라고 정의하고 싶다. 나는 가끔 국내 힙합을 듣는다. 부모님은 저게 뭔 음악이냐고 하지만, 나는 ‘힙합의 세계’를 알기 때문에 즐겨 듣는다. 나한테 핀잔을 주시는 부모님도 세시봉 음악을 들으면 나훈아-남진을 듣는 조부모님께 한 소리 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세계라는 것은 굉장히 폭넓으면서도 좁기도 하다. 여기에서 나는 두 가지 세계를 논하고자 한다. 바로 ‘이성의 세계‘와 ’감성의 세계‘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 두 가지 세계가 명확히 구분된다는 것을 나 스스로 납득을 하고 싶어서다. 왜냐면, 지난 30년의 세월 동안 이 두가지 세계가 구분이 잘 안 되어서 헛발질을 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자, 예로 들어 보자. 군대에서의 일이다. 훈련병인 나는 ‘중간만 해라’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듣고 훈련에 임하였다. 그 중 훈련소 지휘관이 앞에 나와서 이것저것 폼을 잡으며 군대 생활의 마음가짐을 설명하였다.


“군인이 왜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하지? 어디 얘기해봐!”


나는 당연히 조용히 있었다. 중간만 가라 허자야. 중간만 가라 허자야.


“하~ 뭐 정치외교학과, 이런 학과 나온 사람 없어?”


그 순간, 가슴 속에 뭔가 꿈틀꿈틀하는 기분이 들었다. 군인의 정치적 중립성.. 다른 훈련병들은 멀뚱멀뚱 서 있으며 점심에 나올 쏘세지 야채볶음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중대장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138번 훈련병 허자! 말씀드리겠습니다!”


“오 좋아, 군인은 왜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하지?”


“군인의 수호대상은 국민입니다. 하지만 국민의 사상은 제각기 다릅니다. 좌파, 우파, 진보, 보수. 심지어 우리가 적이라 여기는 대상에 호감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군인은 군복을 입은 이상 그 모든 사람들을 지켜야 마땅합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하고, 그 지상 명령은 당연히 국민을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인이 정치적인 견해를 가지면 안 됩니다.”


계급도 없는 훈련병이었지만 덜덜 떨면서 말했다. 주변에는 오오 하는 감탄이 종종 들렸다. 나야 대학생 때 친구들하고 내내 토론하며 놀았던 주제라서 그랬지만, 20대 초중반의 친구들에게는 저런 식의 말이 달변처럼 들렸을 수도 있겠다.


정작 당황한 건 지휘관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훈련병들의 기를 죽이고 자신의 멋진 철학을 말하고 싶어했던 것처럼 보였다. 천사백명의 훈련병 앞에서 마이크를 잡아서 뭔가를 얘기하는 건 솔직히 굉장히 고양감이 넘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본인이 생각한 답변이 아니었는지 그는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저렇게 대답하면 안돼. 저런 애들은 군 생활 잘 못해. 그냥 간단하게 생각해봐. 군인이 정치적 중립성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정치관이 다르니 서로 싸우기 때문이야. 그래서 군인들은 말야 어? 여자/종교/정치 얘기는 하면 안되는거야. 저렇게 빙빙 꼬아서 들으면 안된단 말야."


이 사례는 전형적으로 이성의 세계와 감성의 세계가 충돌하는 양상이다. 이성의 세계란 무엇인가. 그냥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어서, 중대장의 지적 자랑과 훈계를 듣는 것이다. 하지만 내 감성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뭔가를 말하고 싶었다. 주변 애들이 소위 나를 ‘나댄다’라고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내뱉고 싶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감성의 세계가 나를 이끈 것이다.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일방적인 담화가 끝이 난 뒤, 훈련소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동기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다. 아는 척 존나 하네 라며 핀잔을 주는 녀석들과 형 되게 말씀 잘하시네요 라며 격려를 해주는 사람들. 두 가지 잣대가 동시에 들이댈 때 혼란에 빠진다. 나는 누구지?


어린 아이들은 보통 감성의 세계에 빠져 산다. 그들은 사고방식이 여물지도 않았고, 감정을 잘 숨길 줄 모르니까. 그러나 나이를 먹고 규율을 학습하게 되면 감성의 세계를 퇴출시키는 것이 미덕이라 여긴다. 그리고 자기 감성만 남발하면 ‘폐급’이라는 낙인과 함께 정상으로 취급되지 못한다.


이성의 세계는 주류로 감성의 세계는 비주류로 취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예전에 예술 및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식사 자리를 자주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러니 확실히 감성의 세계가 주류인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아무래도 그들과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의 수가 적다 보니 자신들만의 세계에 굉장히 큰 애정을 가졌다. 이성의 세계에 어느 정도 발을 들인 내 입장에서는 적응하기 힘든 공간이었다.


감성의 세계는 보통 이성의 세계를 뚫을 수 없다. 이성의 세계 입장에서는 감성의 세계는 현실을 모르고 자기 혼자 날뛰는 짓을 하는 곳이다. 그러나 감성의 세계가 이성의 세계를 압도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권위’를 가질 때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어떤가? 와 멋지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나가는 사람한테 이 문장을 보여주면 ”So What?"이라고 대답할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자 그럼 이거 하나만 추가해 보자.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 한강 ‘소년이 온다’ -


이렇게 되면 챗지피티나 구글에다가 한강을 검색해 본 뒤, 그의 이력을 나열하며 얼마나 멋진 문장인지 찬동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감성의 세계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힘이 든다. 더군다나 이성의 세계에 어중간하게 걸터 앉아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냥 묻어가기에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대놓고 반항하지도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보다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들이 무지하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신경쓸 필요가 없는 것들에는 별도로 신경쓰지 않고 산다는 뜻이다.


감성의 세계에 힘을 쏟는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바로 ‘수험’이다. 나도 대학 입시와 취준이라는 긴 터널을 거쳤지만 매우 힘들었다. 내가 힘든 건 공부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다. 공부를 하는 동안 가지고 있는 감성의 세계를 어찌할 줄 몰라서인 것이다.


외워! 왜요? 외워! 왜요? 외워! 왜요?


수험기계로 나를 만드는 이 과정이 매우 힘들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공부에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단순히 수험 소재로 보아야 할 미적분이나 윤리와 사상의 철학자들에 난 깊은 관심을 느꼈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지적 호기심 이상의 것을 느끼니, 쓸데 없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회사에 온 뒤로도 이런 충돌은 자주 발생한다. 내가 애정을 가지는 것들은 사실 중요하지 않고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따로 있다. 다행히 나는 상사가 시킨 일을 묵묵히는 처리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항상 근원을 생각해서 왜? 왜? 왜? 를 따지고 든다. 그러다가 가끔 시키지도 않은 일을 헛발질한 뒤 혼자 전전긍긍한다. 너무 나댔나?


감성의 세계와 이성의 세계는 명확히 분리되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권위를 가지면 양쪽 벽은 허물어진다. 내 감성이 곧 이성이 된다. 권위를 가지지 못한 감성은 배척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것을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할 때 내 감성이 상대를 설득하지 못한다고 해도 기죽지 말고 괜시리 실망하지 않아아 한다.


감성의 세계는 확실히 힘이 되준다고 생각한다. 홀로 있을 때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되면 이성의 세계로부터 온 여러 아픈 것들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글을 쓰고 책을 보고 혼자 연마하는 이 모든 일련의 행위가 나를 적당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기분이 든다.


여기 쓰는 이 브런치 속 나의 감성의 세계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도, 기죽지 말자. 공자께서 말하셨던 것을 살짝 변용해서 말해야 겠다.


이성의 세계가 내 감성을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 감성의 세계가 이성의 세계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을 염려하자. 충분한 설득력이 없다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감성의 세계에 도전했던 수많은 연예인 지망생들은 대체로 권위를 가지지 못한 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진다. 그럼에도, 한때 도전했던 나를 기억하자.


내 감성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자. 타인의 감성이 내 감성에 공감했다면 감사를 느끼자. 나는 내 할 일을 하자. 그리고 가끔 여기 와서 감성을 잃지 말자. 그래도 내 감성이 나를 이성의 세계에 유일하게 반(反) 하고 응(應)하게 도와주는 존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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