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그레이버 '불쉿 잡'을 읽고
우리 회사 옆에는 ‘한국잡월드’라는 건물이 있다. 초·중학생들이 직업체험을 하러 몰려드는 곳이다. 회사 생활에 쩔어 있다가 이따금 그 옆 건물로 산책을 나가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아이들은 소방관 헬멧을 쓰고, 청진기를 목에 걸고, 경찰 제복을 입고서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모습을 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너의 꿈을 찾아 원하는 걸 하렴”이라며 다그칠까? 그리고 아이들에게 온갖 환상을 심어주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현혹시키지만, 정작 나이를 먹으면 청년 실업에 시달리게 하여 먹고살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게 하는 기이한 구조를 자동으로 깨닫게 할까?
사실 ‘자아’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 이후 등장한 사치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던 중세와 근대 초기에는 개인이 자신의 꿈을 펼칠 여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농사를 짓는 이유는, 아버지가 그랬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서, 할아버지는 그 앞 세대에게서. 생존의 연쇄 속에 ‘적성’은 아무런 우선권을 갖지 못했다.
물론 옛사람들도 개성을 표현하는 놀이는 있었다. 고누를 두고, 씨름을 하고, 사물놀이를 하며 마을 사람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바탕 놀고 나면 각자의 밭으로 돌아갔다.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말하고 싶진 않지만,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분명하다.
개인의 적성과 직업은, 본질적으로 무관하다.
회사를 다니며 이 사실은 더욱 와닿았다. 부서마다 업무가 다르고, 다루는 정보나 상대하는 조직도 제각각이지만, 결국 모두가 하나의 삶을 산다. 바로 ‘직장생활’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윗사람이 좋아할 보고서를 만들어 결재를 받고, 주말을 쉬고 월요일에 다시 출근하는 그 ‘직장생활’ 말이다.
그런 직장생활과 효율은 전혀 다른 문제다. 생각해보면 ‘월급’이라는 제도 자체도 효율적이지 않다. 정말 효율이 중요하다면, 일을 한 만큼만 돈을 줘야 하지 않을까? 물리학에서 ‘일’이란 힘을 가해 물체를 움직이는 행위다. 하지만 현실의 노동은 그렇게 계측되지 않는다. 조모임 하나를 하더라도, 내가 들인 시간과 결과물 사이에는 불균형이 존재하고, 노력은 언제나 외부의 평가 앞에서 무력해진다.
회사가 우리에게 돈을 주는 진짜 이유는, 일을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배하기 위해서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자체가 업무가 된다. 겉보기에 무의미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가치’가 부여된다. 40도 폭염이나 영하의 한기 속에서도 왕궁 앞에 무표정으로 서 있는 영국 근위병처럼. 그들의 행위에 실질적 효율이 있을까? 그래도 그건 ‘의전’이라는 이름의 고된 노동이다.
친구들과 대화하다 보면 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내가 하는 일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느껴져.”
“회사에만 있다 보면 밖에 나가서 아무것도 못하는 거 아닐까, 그게 무서워.”
나는 그 말이야말로 본질을 찌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회사는 우리를 “밖에선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맞춤 제작한다. 그게 바로 회사가 말하는 성장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를 둘러싼 지위와 네트워크 품에서만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회사가 바라는 성장은 간단하다. 지시받은 일을 일정 수준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 그 이상은 오히려 독이 된다. 균형이 맞춰진 뒤에는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짓’을 한다. 화장실에서 주식 앱을 들여다보거나, 회사 PC로 쇼핑몰을 켜거나. 물론 회사 업무는 아무리 파도파도 끝이 없고, 해도해도 또 할 게 생기지만, 더 할 동력은 없다.
'불쉿 잡' 은 그런 구조를 드러낸다. 겉으로는 효율을 중시하는 기업이 얼마나 비효율의 퍼포먼스로 운영되는지를 해부한다. 물론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문체는 공격적이고 반기업적이어서 어떤 사람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게다가 등장하는 사례들 중 다수는 개인이 느낀 ‘쓸모없음’이라는 주관적 감각에 기초해 있어, "이거 조직 부적응자의 한풀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쓸모없음의 감각’이 오늘날 직장인의 실질적인 '현타'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다들 말하지 않을 뿐, 은밀하게 공유하는 무력감. 그 기이한 공통점에 대해 이토록 노골적으로 말한 책을 이 책 외에 나는 본 적이 없다.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질문의 방향이다. 아이는 “이건 뭐예요?” “왜 그래요?” 하고 묻는다. 그 질문은 지식 습득이 목적이 아니라, 누군가와 연결되기 위한 행위다.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아이들은 여전히 어른에게 묻는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질문은 바뀐다. “이 숫자 맞아?” “이거 보고한 거 확실해?” — 이는 더 이상 호기심이 아니다. 책임 회피와 위계 확보를 위한 언어 전략이다. 그리고 그런 언어들을 포장하고 정제하며 자기 위치를 지키는 것. 그것이 조직생활의 기술이 된다.
그렇다고 이 세계를 경멸할 필요는 없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불쉿 같은 일 속에서도 고귀한 삶을 살아가며 가정을 꾸리고 국가 경제를 지탱한다. 장자가 말한 무용지용처럼, 때로는 쓸모없음이야말로 존재의 기둥이 된다. 그리고 구조 속에 놓은 개인은 그런 무력함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의미를 찾는 곳으로 차츰차츰 나아가서 향상(enhancement)을 꿈꿔야 한다.
잡월드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도 저렇게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그 일이 가능하다면, 지금 하는 일과도 이어졌으면 좋겠다. 툴툴대며 해온 직장생활이지만, 그 안에서 얻은 지식과 사회적 관계를 전부 무가치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에너지, 석유, 국제관계 같은 것들. 그런 공부들을 쓸모 있는 방식으로 연결할 수 있다면, 나는 그 방향을 따라가고 싶다.
그런 일을 하게 된다면, 돈과는 조금 거리를 두고 싶다. 물론 돈은 중요하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수익을 내야 하니까. 하지만 아이들은 직업체험관에서 소방관 헬멧을 쓰고 의사 가운을 입으면서 서로의 평균 연봉을 검색하지 않는다.
행위 그 자체가 의미가 되는 일. 그런 직업을 언젠가는 해보고 싶다. 그건 커리어가 아니라, 꿈이라는 이름으로 내 진로 좌표에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