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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seung Mun Jul 16. 2016

인간이 잉여가 되는날, Singularity.

우리는 죽는날을 고르게 될까?

싱귤레리티(Singularity)는 특이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현재 구글에서 일하고 있는 이미 할아버지의 나이대로 접어든 레이먼드 커즈와일이 제시한 개념의 싱귤레리티는 특정한 시점이 되면 인공지능을 비롯한 다양한 컴퓨팅이 인간의 역할을 대체한다는 뜻의 단어이다.


그 특이점의 시기를 지나면 사람들의 역할이 완벽히 바뀌는 것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46960&cid=42107&categoryId=42107




커즈와일이 이야기하는 싱귤레리티는 어떤 자료에서는 2045년 그리고 다른 자료에서는 2049년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토마스 슐츠의 '구글의 미래'에서는 2049년으로 기술되어 있다.) 즉 30년 가량 후면은 이미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30년이라면 내가 건강하게 삶을 살아가면 만날 수 있는 시간이며, 나의 자식세대들이 한참 본격적으로 인생을 살아갈 나이이다. 멀었다고 하면 멀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또 얼마 안남은 시간이기도 하다.






불과 십년 이십년 전만하더라도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고 자동화가 되고 하는 모든 일들은 인류에게 축복으로 다가왔었다. 자동화, 로봇 그리고 인공지능 등은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처할 수 있는 많은 위험들로부터 인류를 구해냈으며, 사람이 했을 경우에는 어리숙하거나 완벽하지 못할 수 있는 일들을 보완해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즉 지금까지의 자동화, 로봇 그리고 인공지능이 인류에 미치는 영향은 다소 조연의 부분에 머물러 있었다. 왜냐하면 사람 즉 인간 혹은 사피엔스가 지금까지는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동화, 로봇 그리고 인공지능은 마치 오달수가 영화의 주연을 맡듯이 시나브로 자신의 위치를 바꾸어버렸다.







그렇게 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자신의 일을 대신했던 기계에게 고마움을 느꼈던 인간이 점점 초조해질 수 있다. 자신의 존재 의미에 물음표가 붙기 때문이다. 이건 제자가 갑자기 실력이 늘어서 불안한 스승의 마음의 수준과 다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야 제자가 다시 나이들면 승자가 패자가되고 또 다른 새로운 승자가 나타날 수 있지만 인간과 기계의 관계는 한 번 뒤집히면 다시 뒤집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즉 싱귤레리티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이다.













한편 이처럼 스물스물 다가오고 있는 싱귤레리티의 시대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막연한 미래에 가질 수 있는 몇 가지 고민이나 질문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것들은 모두 뛰어난 과학기술의 발전이 불러오는 새로운 선택권 이기도 하다.




직업

 - 우리는 직업을 고를 수 없게 되는건가? 직업이라는게 있는건가?

 - 직업은 사라지고 취미만 남게 되는건가?

 - 직업이 없고 취미나 일상만 남으면 자본주의의 구조 즉 개개인이 가지는 자본 수입의 구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 그렇게 되어버리면 (즉 산업에서 인간이라는 변수가 사라져버리면) 부(富)는 일말의 변수가 없이 세습되는것인가?


삶과 죽음

 - 우리는 죽는날을 고르게 되는건가?

 - 칼리코(Calico)와 같은 회사들이 생명과학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게 되면

 - 건강하게 오래도록 살다가 마치 컴퓨터의 전원 플러그를 뽑듯이 삶을 마무리 해야 하는건가?

 - 사실 현재 존재하는 생명유지장치들에 대한 이슈들이 더 확대된 수준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창작

 - 심지어 내 묘비가 만약에 있다면 그 묘비에 쓰일 글귀는 누군가의 감정에서 우러나올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결혼을 할때 청첩장에 적힐 문구를 고르듯이 추천 알고리즘을 통해서 선택될 것인가?

 - 결국 세렌디피티의 아름다움은 2049년에는 거의 사라지는 것인가?

 - 음악과 그림을 비롯한 순수 예술의 영역은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떠날 때는 순서가 없다' 라고 이야기 해왔다. 그런데 이제 그 말도 슬슬 바뀔때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보다 높은 수준의 철학적 질문도 가능하다.



생태계의 관점에서 인간이 잉여가 되는 것 즉 싱귤레리티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인간은 생명의 생태계로 부터 완벽한 분리를 꿈꾸는걸까?


더 오랜 삶을 원하는 인류가 자신이 사랑하는 애완동물들에게도 더 오랜 삶을 선물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이건 물론 임모탈의 경지를 이야기하는 것 까지는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런 유형의 인간 욕심을 통제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 시스템의 변화인가? 아니면 지구 생태계 전체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까? 2049년의 지구가 매우 궁금해진다. 그 시점에도 변화하는 미래를 거부하는 아날로거(Analoger)들은 분명이 있을 것이다.








아마 싱귤레리티가 완전히 자리잡는 시점이 가지는 의미는 지구라는 행성의 관점에서 공룡과 같은 파충류 들이 대거 사라진 시점 이후에 가장 중요한 변화의 시점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나의 관점으로는 2차 세계대전, 미대륙 발견, 전기의 발명을 넘어서는 수준의 변화가 아닐가 싶다.




페이팔의 창업자였던 피터틸은 '이 세상이 나아지려면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가?'와 같은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해결하려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동시에 내 삶을 연장시켜주겠다고 하면 그것을 싫다고 부정할 수 있는 사람 역시 거의 없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모든 이들은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만, 역시나 천국에 가기 위해서 바로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하지만 모든 인류가 40년을 더 살게 되는 식의 미래가 인류에게 좋은 결과가 될지는 모르는 것이다. 이건 어쩌면 사회적 비용과 개인의 만족간의 괴리일 수도 있다. 사회가 좋아지는 것이 개인 구성원이 각각 좋아지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완벽을 원했던것인가? 인간다움을 원했던 것인가? 혹은 완벽함이 인간다움인건가에 대한 문제로 연결될 것이다. 기술이 인문학과 만났던 첫 시점은 그렇게 아름다웠지만 그 끝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조금 마음이 불안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히려 철학이 중요해지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난 여전히 무엇이 옳은 것인지 혹은 맞는 방향인지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 아마 나도 미래지향적이어만하는 기업가의 위치에서 문제를 꼭 찾아서 해결해야 하는 피터틸이나 레리페이지의 입장이었다면 그와 동일한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기에 피터틸이 이야기하는 이 세상이 나아지는 방법 혹은 구글이 하고 있는 다양한 미래 기술들이 인류를 대체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줄것 같다는 확신이 없다. 우리는 편안함, 행복함, 즐거움, 성취감이 모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도 Tic Toc 시간은 싱귤레리티를 향해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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