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사람이니 이미 그가 그 말을 남긴지 약 2,300년에서 2,400년 가량이나 흘렀음에도 그 말은 여전히 명언으로 통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삶과 사회 그리고 인류의 관점에서 그렇지 못한 사례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그가 살았던 그리스 시대 즉 민주주의가 꽃피던 시기에는 정치적인 의미로 분명히 맞는 말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아직도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라는 명제가 들어 맞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른 현상들을 살펴보자.
지구의 적정인구는 1~10억명 그리고 많게는 최대 80억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지구의 인구는 약 73억명으로 알려져 있다. 지구는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국가인가는 인구의 감소가 필요한 법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3&aid=0003200014
실제는 어떤가? 실제로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국가들은 인구 자체가 국가의 경쟁력이기 때문에 인구가 감소하지 않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각각의 국가의 정책이 성공하면 어떻게 되는것인가? 지구는 점점 더 피폐해 진다. 즉 전체가 가지는 가치가 각각의 조직들이 가지는 가치와 다르게 된다. 각각의 국가의 경쟁력 강화가 지구라는 별의 재앙이 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국가경쟁력/인구증가/자연환경파괴 라는 연결 고리가 있기 때문이다.
유사한 경우를 보자.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사람들은 모두 오랫동안 살기를 원한다.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모든 이들은 천국에 가고 싶지만 천국에 가고 싶어서 죽고 싶은 이들은 없다. 한편 이처럼 개인의 측면에서 삶을 오래 영위 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개인에게는 좋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노령화 인구가 심각하게 늘어나는 상황으로 다가온다. 개인의 니즈가 모두 충족이 되면 사회가 병드는 것이다.
UX나 서비스 기획 분야에서는 몇 년 전부터 AB테스트가 유행이다. 나 또한 케이스에 따라 편차는 있겟지만 AB테스트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페이스북을 보다가 그런 AB테스트에 대한 충격적인 글을 보게 되었다. 그건 바로 AB를 너무 신뢰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이러하다. AB테스트는 동일 상황에 대한 최선의 부분선택을 알려주는 방법이다. 그런데 그건 말 그대로 다른 모든 상황들이 동일해야지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다르게 AB라는 방법을 신격화하여 서비스 페이지와 앱의 전 분야에서 포괄적으로 AB테스틀 해 버린다면 그건 지나치게 최적화가 덕지 덕지 붙어 있는 페이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최적화의 개념이란 보통 사람들의 눈에 띄거나 좋아 보여서 선택되어지는 경우를 이야기한다. 즉 버튼의 색이 확 튀어서 혹은 판매되는 상품의 문구가 화끈해서 등등의 자극들이 AB테스트에서 승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첫 번째로 지나치게 눈에 띄는 자극 위주로 AB테스트는 승자가 결정되기 쉽고, 두 번째로 이런 AB테스트가 사이트 곳곳에 진행이 되면 조화를 이루는 사이트가 아닌 그냥 강한 자극의 연속인 사이트가 되는 것이다.
부분의 최적이 전체의 재앙이 되는 것이다.
다른 경우로는 이런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각 기업이 생존을 위해서 현금성 자산을 많이 쌓아 놓는다. 보통은 사내 유보금이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이런 현금성 자산은 기업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바로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링겔주사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많은 기업이 이렇게 현금성 자산을 많이 쌓아 놓게 된다면 결국 통화를 발행하는 중앙은행의 입장에서는 발행한 현금이 계속 증발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통화를 발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8630196
최적이 모였지만 최악이 되고, 모두가 더 오래 살지만 사회는 병들고, 돈을 계속 찍어내지만 돈이 없어지는 것 바로 그것이 부분의 합이 전체가 되지 못하는 사례들인 것이다.
이런 문제는 왜 생기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바로 개인 혹은 집단의 최적이 전체에 영향을 미칠때 변수 자체가 바뀌기 때문일 것이다. 즉 개인의 건강과 장수는 사회의 사회적 비용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치의 합산이 정확히 동일한 척도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개인과 집단은 괴리를 가질 수 밖에 없다.
특히나 요즘처럼 사회적 구조가 조직적으로 느슨하지 않고 Peer to Peer로 즉 점조직처럼 엮여 있는 경우는 이런 현상이 가속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개인이 혹은 부분이 수휘할 수 있는 이득을 빠르게 취할 것이고 그에 따라 조직은 혹은 사회 그리고 전체는 빠르게 경직되기 때문이다. 마치 현금을 쌓아 두어야 겠다는 기업이 하나만 생겨나도 그 사회의 전체 기업들이 빠르게 그렇게 움직이듯이 말이다.
'한계비용이 제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지고 싶다. 전체 사회의 구성이 좀 더 Peer to Peer로 촘촘해져야 하는 것 역시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분명히 개개인에게는 그리고 순간순간에는 좋은 것이 분명한게 궁극적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혹은 우리 모두에게로 그 질문이 바뀐다면 더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또 '좋은것'이라는 가치 판단에 대해서 많은 질문들이 생겨난다. 내게 좋은 것과 우리에게 좋은 것 사이의 괴리가 크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서 보이지 않는 사회의 감당하는 부분에 대한 생각들과 먼 미래에 대한 (불필요할지도 모르는) 걱정들이 떠오르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