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서스로는 할 수 없었던 것들
10월 4일 구글이 새로운 레퍼런스 폰인 픽셀(Pixel)폰을 발표하였다. HTC와 함께 넥서스원을 만들었던 2010년 1월로부터 거의 만 7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 구글은 다시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 있다. HTC와 다시 손을 잡고 말이다. 그럼 픽셀폰은 구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존 구글의 모바일 기기 브랜드인 넥서스는 안드로이드 생태계 활성화를 위해서 제조사 영향이 크게 작용하는 쪽으로 디바이스가 제작되었다. 처음 넥서스가 나오던 때만 하더라도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버전도 매우 낮았고 성능 역시 iOS와 큰 격차가 있었다. 게다가 안드로이드 시장점유율이 현재처럼 전 세계적으로 압도적이지도 않았다. 자연스레 안드로이드 레퍼런스폰을 만드는 파트너사를 구하는 데 있어서 수많은 제조사가 구글에 러브콜을 열열하게 보내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안드로이드의 초기 개발단계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HTC가 첫 넥서스 제품을 함께 하게 되었다.
이후 안드로이드의 태풍 아래로 전 세계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구글은 시장 규모가 더 크고 제품 생산 능력이 뛰어난 회사들과 레퍼런스 폰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삼성, LG, 화웨이가 그들이다. 이런 동맹 덕에 제조사는 안드로이드 새 버전을 빠르게 받아들여 제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고 구글은 높은 수준의 하드웨어에 새로운 버전의 안드로이드를 올릴 수 있었다. 덕분에 안드로이드가 전 세계적으로 더 큰 인기를 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제조사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안드로이드 생태계는 분명히 구글에는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넥서스라는 브랜드를 탈피한다는 것은 기존 구글 레퍼런스폰의 생태계를 극복해 보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그 헤게모니의 이동은 매번 넥서스 시리즈를 출시할 때마다 조금씩 감지된 부분이었다. 처음에는 구글이 원활한 안드로이드의 구동을 확인하기 위해 제조사에 협력을 요청하던 것이 최근에는 많은 제조사가 안드로이드 최신 버전을 선탑재해보고 싶은 마음에 구글에 구애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한편 구글 역시 모토로라를 인수하는 등 하드웨어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픽셀폰은 구글이 오래전에 버렸던 카드인 HTC를 구글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는 제조 파트너로 선택해 스마트폰 시장에서 반전을 노리는 구글의 새로운 전략이다. 실제로 픽셀폰에는 구글 마크는 있지만, 제조사인 HTC에 대한 표기는 없다.
구글은 오래전부터 랩탑과 같은 타입의 거치형 컴퓨팅 기기에 욕심이 많았다. 태블릿에 키보드를 부착하는 기기를 포함해서 말이다. 거치형 기기는 큰 화면을 통해 콘텐츠 소비에서 강점이 있을 뿐 아니라 부분적인 문서 작업 등 생산성의 영역까지 커버한다. 예를 들어 아이패드가 동일하게 이 세그먼트를 공략하고 있다. 이 영역은 일반 스마트폰과 패블릿, 노트북, PC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는 역할을 한다.
구글 역시 이 시장에 관심이 많아서 안드로이드 태블릿, 크롬북 그리고 픽셀C까지 연결되는 라인업을 만들어왔다. 기본적으로 노트북보다 휴대성이 좋고 스마트폰보다는 생산성이 좋은 제품들이다. 거기에 구글은 특유의 웹과 클라우드 생태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이 시장에 눈독 들일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크롬북과 크롬 OS가 점점 잠잠해지는 사이 등장한 디바이스가 바로 픽셀C이다. 많은 사람이 아직 픽셀C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하지만 픽셀C가 10인치의 소형 디바이스 시장을 공략하면서 바로 아래 5인치(Sailfish), 5.5인치(Marlin) 화면을 가지고 있는 픽셀XL 시리즈가 시장을 연결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구글 입장에서는 크롬이나 넥서스 혹은 그냥 안드로이드 탭 등으로 분화되었던 구글 기반의 디바이스 라인업에 대한 통합 브랜드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마치 애플이 아이+폰, 아이+패드 시리즈를 가지고 있고 삼성이 갤럭시, 갤럭시+노트, 갤럭시+탭 시리즈를 가지고 있듯이 말이다.
구글은 10월 4일 발표에 대한 오피셜 페이지에 새로운 스마트폰 실루엣과 함께 구글 로고를 사이좋게 배치하였다. 이는 폰 외형에서 구글 로고를 찾을 수 없었던 넥서스의 경우와 조금 다른 변화를 알리는 듯하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넥서스를 통해 구글을 알 수 없었지만 이제 픽셀을 통해서는 구글을 인지할 수 있다. 구글은 픽셀 외관에도 구글의 G 마크를 넣었다. 이런 변화는 이제 구글이 하드웨어 디바이스를 소프트웨어 검증을 위한 테스트베드로만 사용하지 않고 더 나아가 구글 자체를 알리는 브랜딩 및 포지셔닝 용도로도 활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려준다.
지금까지 고객들이 느꼈던 넥서스 폰의 긍정적인 이미지는 주로 가격 대비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안드로이드의 새로운 버전을 가장 먼저 업데이트할 수 있다는 소프트웨어 스펙적인 장점도 있지만 많은 사람은 그 특유의 가성비 때문에 넥서스를 구매하였다. 한편 이런 저가 이미지로 굳어지는 가격 포지셔닝은 하드웨어 전략상으로는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고가의 정책을 펼치는 애플의 경우 아이폰C같은 저가형 디바이스를 만드는 것은 시장의 확장이며, 고객에 대한 배려이지만 넥서스같이 기존에 중저가로 인식된 폰이 갑자기 고가 제품을 출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고객들에게 비치기 때문이다. 결국 구글의 고가 스마트폰 라인업을 위해서는 새로운 브랜드가 필요했다.
일단 픽셀의 32GB 버전은 $649로 밝혀졌다. 과거 5.7인치 화면을 가지고 있었던 넥서스 6P의 가장 큰 저장공간인 128GB 모델 가격이 역시 $649이었다. 픽셀의 128GB 버전은 그보다 더 비싼 $749이다. 화면이 더 큰 픽셀 XL의 128G 버전은 $869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00만 원이 넘는 가격으로 판매될 수도 있다. 이런 가격 정책은 16GB에 $379의 가격을 책정하였던 넥서스5X와 거의 두 배에 달하는 큰 차이이다. 즉 애플과 비슷한 고가 라인업의 레퍼런스폰을 만들고 싶었던 마음을 유감없이 드러낸 것이다. 참고로 아이폰7의 가장 저렴한 모델인 32GB 모델의 가격이 $649이다. 그 두 개의 가격은 분명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어쨌든 구글은 픽셀XL을 가성비로 어필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럼 픽셀XL의 스펙도 살펴보자.
AP: 퀄컴 스냅드래곤 821 (GPU: Adreno 530)
RAM: 4GB
CAMERA: 8MP전면, 12MP후면 (IMAGE SENSOR: SONY IMX 378)
OS: ANDROID 7.1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퀄컴 최고사양 AP와 4G 메모리 그리고 이미지센서이다. 넥서스6P가 스냅드래곤 810과 메모리가 3G였으니 AP와 메모리는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되었다. 이미지 센서 역시 기존 넥서스 6P의 IMX 377센서에 F2.0 밝기의 렌즈를 조합한 라인업을 승계하여 IMX 378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즉 저사양폰인 넥서스5X와의 연관성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6P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픽셀XL이 탄생한 것이다. 넥서스 5와 5X로 이어지던 저가 레퍼런스폰 라인업은 그나마 넥서스 시리즈 중에서 많이 팔린 축에 속하겠지만 이제 구글은 넥서스 고급 버전의 업그레이드 모델인 픽셀로 아이폰과 경쟁하고 싶은 것이다.
픽셀폰이 등장하자 ‘과연 픽셀폰이 아이폰과의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다른 부분에 더 궁금증이 많다. 바로 ‘구글이 픽셀 시리즈로 스마트폰 라인업으로 전개하고 나면 넥서스 브랜드는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이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향은 넥서스 시리즈가 사라지는 것이다. 좀 더 색다르게 보면 구글이 픽셀과 넥서스 브랜드를 나누어 운영할 수도 있다. 넥서스를 저가형 레퍼런스 모델로 나누어 레퍼런스 폰 라인업을 이원화하는 식으로 말이다. 구글 역시 넥서스가 가지고 있는 브랜드 가치나 가성비 등으로 대변되는 긍정적 이미지를 순식간에 버리기 어려울 수 있다. 게다가 적어도 지금까지의 분위기로는 픽셀폰에 대한 가격이 지나치게 높게 잡힌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역시 존재한다. 그렇다면 일단 모바일 라인업을 픽셀로 집중하되 넥서스에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 지원 범위를 조금 줄이면서 저가형 넥서스 브랜드를 유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번 안드로이드 7.0 업데이트에서 넥서스5에 지원을 제외하는 등의 모습에서 그 가능성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허브줌(hub.zum.com)에 게시된 글입니다.
http://hub.zum.com/aquaterra/57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