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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seung Mun Dec 20. 2016

내읽책_과학혁명의구조

매우 어려운 책을 읽고 써보는 어려운 독후감

일단 이 책에 대한 여러가지 나의 느낌이나 얻은바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 전에 사실 나는 이 책에 대해서 내읽책 리뷰를 써야 하나 고민하였다. 그 첫번째 이유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내가 과연 이 책을 이해한 것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떄문이며, 두번째로는 이 책 자체가 워낙 완결성이 높은 책이기 때문에 나 혹은 다른 어느 누구라고 하더라도 이런 완결성이 높은 책에 대해서 무슨 리뷰를 쓸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인 토머스쿤은 일반 과학자가 아니다. 그는 과학사학자이면서 과학철학자이다. 그는 하버드에서 물리학박사를 받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물리학적 관점에서 이 책을 풀어갔다. 물론 다른 수 많은 과학의 영역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동행하면서 말이다.



한편 이런 토마스 쿤은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실재론과 비실재론의 입장을 가지고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인 칼포퍼와 상반된 견해를 가졌다. 토마스 쿤은 이 대목에서 과학은 어떠한 패러다임이 생기는 과정에서 비판적인 이론이 사라지면서 과학이 생겨난다는 쪽이었다. 이 부분 역시 나는 피상적으로 이해하였지만 내 머리로 그 깊은 의미를 다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쿤의 관점에서 정상과학이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하다. 한편 그 정상과학은 만들어지는 것인데 예를 들어 관찰 즉 현상을 보는것, 그것을 패텬화하는 것, 그리고 이론화하는 것, 이후 증명을 위한 대입이나 실험 거기에 추가하여 예외의 수립, 마지막으로 기존의 패러다임이 깨지는 파괴 혹은 개선의 순환 과정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포괄적이면서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과학에 대한 정의이다. 어쩌면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을 수 있는 과학을 나름의 패턴화된 단계로 잘라 구분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나는 한 가지 잡생각이 떠 올랐다. 사실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사람이 만든 여러단계의 구분에 따라서 과학이 정의되면 다행이지만 이런 학문적 수단으로서의 툴이 실제 세상에 전혀 동작하지 않는 모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이런 생각이다. 사람은 사람의 DNA가 제각각이라 특정 질환에 대한 백신이 나오더라도 모든 이에게 효과가 동일하지 않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오히려 큰 부작용을 겪게 된다. 만일 상대성이론을 포함한 모든 법칙이 모든 은하와 행성 등에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어떨까? 난 그런 관점에서 이 책에서 꽤 많은 사례를 들고 있는 천문학의 영역에서는, 전 우주에  대한 지식을 망라하고 그걸 과학이라는 테두리로 둘러싸 묶으려고 한다면 절대적인 명제란 있을 수 없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다.


혹은 물리학의 영역에서도 기껏 우리가 만들고 있는 과학은 우리가 보기에 벼룩들이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의 유전자를 개량하고 그들만의행동패턴을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어차피 뛰어야 벼룩인 것이다. 벼룩들이 그들만의 정상과학을 만든다고 한들 이 세상에 미치는 그 정상과학의 영향의 폭은 매우 한없이 제한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추가로 든 생각은 증명에 대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지동설이 최종적으로 검증되는 단계는 즉 지동설에 대한 반론이 전혀 제기 되지 않는 단계는 정확히 우주의 밖으로 우리가 나아가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돌고 있는 것을 육안으로 목격했을때일 것이다. 그러기 이전에 지동설의 가능성은 99.999999로 수렴하고 있겠으나 정확히 100%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지동설을 의심한다는 것은 아니다.) 즉 그렇기 때문에 증명이란 혹은 실재론은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고 과학은 그렇기에 쿤의 이야기와 같이 반박이 사라지는 순간 성립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좀 까칠하게 생각해보자면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는 현상의 이론화라는 것은, 마치 그 현상을 보여주는 숫자 몇개를 던져주고 그 숫자 간의 상관관계를 동일하게 나타내는 수식을 하나 만드는 것과 같을 수 있다. 하지만 서너가지의 숫자들이 서로 어우러져 '='을 가지는 방정식을 만들떄 그렇게 만들어질 방정식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하나의 2차방정식 혹은 3차방정식 위에 이외는 다른 형식으로 그 서너가지 숫자들을 또 다른 형식으로 정의하는 고차방정식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3차방정식이었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7차방정식이었다라는 식과 같이 말이다.






관찰함과 증명함 그리고 이론화는 사회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소통하는구나'라는 것이 관찰이고, 그것을 증명한 것은 싸이월드라면, 거기에서 이론화의 단계까지가고 패러다임의 단계로 진입한 것은 페이스북인 것이다. 아마도 이런 과학적 혁명의 구조 떄문에 마크주커버그가 이 책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쿤이 강조한 기존의 패러다임이 무너지거나 고쳐지는 단계에는 기본적으로 의심이라는 기재가 있어 보인다. 반론이 제기되지 않던 영역에 토가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견들은 즉각적으로 수면위로 올라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건물의 벽면 페인트가 벗겨지기 시작한다고 건물을 다시 짓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녹물이 나오거나 외풍이 많이 들어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그런 이유로 새 건물을 짓지는 않는다. 과학혁명의 구조가 변하는 과정에서도 기존의 정상과학으로 인정받았던 패러다임의 영역에 작은 의심들이 던져진다고 하여 금새 새로운 패러다임이 인정받기는 어려울 수 밖에  없는 법이다. 그것은 가열차게 논의되어 공통된 의심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 공통된 의심은 비실재론적 관점에서 인류 과학 문명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노력들은 누적된다.


물론 슬프게도 그런 누적에  대한 격한 공감 아까 이야기 하였듯이 전우주적 관점에서 인간은 우주 내 벼룩 혹은 그보다 못한 미물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에 과연 티끌의 누적이 어떤 의미일까 싶기도 하다. 천문학에서 특히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 책이 가장 대단하다고 느낀 부분은 순간순간 느껴지는 인사이트에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라부아지에, 뉴턴과 그의 프린키피아, 코페르니쿠스, 맥스웰, 뤤트겐 그리고 데카르트와 게슈탈트까지 망라되는 사회학과 심리학,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에 대한 실질적 사례들에 있었다. 그들은 방대한 영역안에서 이 책에 인용되고 서로 관계가 맺어졌다. 아주 촘촘하게 말이다. 그야말로 '석학'이기때문에 만들어낼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 책이 어려운 것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단연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그래서 과학을 사랑하고 철학을 사랑하고 시간이 많은 사람에게는 필독서이겠지만 그 셋중 어느 하나라도 해당이 없다면 이 책은 잠시 보류해두기 바란다. 혹시 세 가지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면 바로 이 책에 도전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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