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물고기를 물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과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를 때려 잡는 것, 어느 게 더 어려운 일이겠나?
'타짜'라는 허영만의 만화 1부에서 나오는 대사다. 사기 도박꾼들 사이에서 사기를 치는 것 보다, 사기를 칠 사람을 도박판에 앉히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이야기다. 조금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상담치료를 하다 보면 가끔 이 대사가 떠오를 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내가 운영하는 상담소를 찾는 사람들 중 90%, 아니 95%는 어떠한 정신 병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그들 주위에 정신병 진단을 가지고 있거나 상담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를 돕기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해가면서라도 타인의 일을 우선적으로 챙기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생활의 지속에 지친 사람들이 상담소를 찾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묻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 또는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 뭘 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라고.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은 가족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연인, 또는 가까운 친구일 때도 있다. 그리고 나는 항상 같은 질문을 한다. 그 사람과 함께 상담소를 방문하는 것은 어떤 지.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 또한 항상 같다.
“그(녀)는 상담을 원하지 않아요.”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 상담에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원격으로 치료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상담 치료가 진전을 가지기 위해서는 내담자의 문제 인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때문에 내담자를 강제로 상담소로 끌고 온다 하더라도 – 가장 대표적인 예가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끌려오는 자녀들 – 초반 치료의 진전은 매우 더딜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담’, ‘심리치료’에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살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나, 마음 치료의 중요성에 대해서 배운 적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본디 ‘마음의 상처는 정신력으로 버텨야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사회적 선입견은 우리에게 ‘마음이 아픈 사람’ = ‘정신력이 나약한 사람’ 이라는 잘못된 논리를 만들었다. 처음 상담 의뢰로 전화를 하는 내담자분들에게 – 특히나 한국인분들 경우에는 반드시 – ‘나는 아무런 정신병력이 없는데 심리치료라는 것을 받는 것이 괜찮을까요?’ 라는 질문을 받는다. 곧 ‘상담 치료를 받는 사람’ =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 이라는 선입견이 우리 사회에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심리 치료에 대한 선입견은 다음에 조금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어쨌거나, 우리에게 심리치료, 상담은 아직 생소한 것이고, 부정적 선입견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해야 할 점이다.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이 상담소에 올 마음이 없다면, 현실적으로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당히 제한적입니다”
내가 이렇게 대답을 했을 때 M양은 어느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깊은 한숨에는 막다른 벽에 부딪힌 것 같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첫 상담 세션에서 남자친구에 대한 고민으로 상담소를 찾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남자친구는 “우울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왔다고 한다. 어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폭력을 어렸을 때부터 여러 차례 목격했고, 결국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에는 재정적인 문제로 아버지께서 그를 키우셨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떠난 어머니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다고 했고, 그런 이유 때문에, 그가 어머니를 만나는 것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배신감을 느껴 폭언을 행사한 적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부모님의 갈등 사이에서 그녀의 남자친구가 유일하게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술이었고, 때문에 그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술을 의존하면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남자친구는 항상 감정적으로 불안한 상태였어요. 자신한테 저는 구원같은 존재라고 얘기했었죠. 제가 함께 있을 때는 마음 아픈 것들을 잊을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저도 연애 초기에 그 사람의 과거를 들으면서, '이 사람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자주 했었어요. 또 동시에 참 가슴 아픈 일이 많았음에도 어떻게든 견디면서 대학까지 왔다는 사실이 존경스럽기도 했고요.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이 부담감으로 다가왔습니다. 1년 남짓 연애를 하는 동안 몇 번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 병원에 실려간 적이 몇 번이나 있었어요. 저는 그때마다 응급실로 찾아가 그 사람을 기다렸죠. 항상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이야기했어요. 저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고. 술에 너무 의존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지만, 이 사람에게는 그게 유일하게 – 제가 없을 때 –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어요. 그 이유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을 생각하면, 그걸 어느정도는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동시에 걱정을 달고 살게 되었어요. 언제 그 사람이 응급실로 실려갈지 모르니까. 또 술을 심하게 마실때는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하는 편이에요. 처음에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한번은 그 사람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친구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겠다고 소동을 피위서, 제가 전화로 그 사람을 진정시켜야 했었죠. 언제부턴가… 저는 걱정이 되어서 항상 잘 때도 머리맡에 휴대폰을 두게 되었어요. 제가 없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하니까. 그 사람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저도 너무 힘드네요. 마지막으로 마음 편히 혼자 잘 수 있었던 게 언제 였는지 모르겠어요. 항상 긴장한 상태라 마음도 몸도 피곤하게 된 것 같아요. 수업에도 집중할 수 없고,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도 자꾸 내고… 가끔은 남자친구 전화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아요. 동시에 죄책감이 너무 밀려오네요… 주위 친구들은 그런 사람과는 헤어지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정말 착한 사람이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요. 점점 지칠수록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들면서, 동시에 제가 없으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될지 두렵기도 해요.”
그녀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내게 물었다.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M씨가 지금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상당히 오랜 시간 남자친구분 탓에 마음 고생이 심하셨을 텐데, 어떻게 지금까지 견디셨나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보였다.
“말씀드렸던 것 처럼, 더 이상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모른 체하기에 죄책감이 들어요. 제가 조금만 신경 써 주면 그 사람도 나아질 테니까… 하지만 또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네요”.
“M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상시 대기를 하고 있는 근무요원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M씨도 제 말에 동의하시나요?”
그녀는 나의 말에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지난 몇 달 동안, M양은 남자친구의 감정적 웰빙(well-being)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어요. M씨은 남자친구가 어떠한 유년시절을 보냈는지 이해하고 있고 때문에 그가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때문에 M씨은 남자친구에게 여러 번 심리 치료를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지요. M양은 남자친구의 유일한 정신적 쉼터가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M씨은 무리해서 심리적 육체적 피로를 견디고 있지요. 언제 울릴지 모르는 전화에 항상 불안해하고, 특히 남자친구가 술을 마셨을때나 밤에는 더 긴장을 하는 편이에요. 덕분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지요. 이제는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에 따른 죄책감, 그리고 그로 인해 그 사람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지속적으로 긴장을 하면서 오늘까지도 생활을 하고 있어요.”
침묵.
“아까 이 생활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정말 M씨가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하실 수 있을까요?”
“제가 쓰러질 때 까지겠지요?”
그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주위에 마음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도움은 ‘곁에 함께 있어주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감정적 교감, 타인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감정의 치유에 커다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할 때, 최선을 다해서 그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그 감정은, 그 방법이 어떤 것인가를 떠나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행동은 때때로 상대방의 심리적 의존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상대방의 감정적 불균형에 대한 자신의 책임감 또한 함께 높아지게 되고, 그 책임감은 자연스레 부담감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점점 커져가는 부담감, 그리고 죄책감의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혹사하다가 결국 지쳐 모든 것을 놓아버리게 된다. 어쩌면 ‘지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상태’가 죄책감에 주저하는 자신 대신에 결정 내려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M씨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그녀는 ‘자신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남자친구를 위해 현재의 생활을 지속할 것이라 이야기했다. 하지만 누구라도 이러한 연인관계, 크게는 인간관계를 지속한다면, 몸도 마음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를 위해 – 그리고 그녀와 남자친구의 관계를 위해 – 정말 필요한 것은, 그녀가 감정적 소모 에너지를 허용할 수 있는 만큼만 사용하도록 유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건강한 인간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마음의 공간’ (Personal Space/Personal Boundary)이 안전하게 지켜져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내 마음의 공간을 침범하면서까지 도움을 원할 경우에는 한발짝 물러서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나 정작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주저하게 된다. 그 행위는 일종의 죄책감을 가져오고, ‘지금까지 계속 해 왔는데 이제 와서 그만두면 그 사람을 향한, 그리고 내가 내 말과 행동에 그건 배신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자기 마음의 공간을 좁혀가면서 다른 사람을 돕게 되면, 그 '감정적 불편함' (emotional discomfort)은 점점 커지게 되고, 장기적으로 보았을때 그 사람과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결과를 낳게된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마음의 공간'을 지키는 것과, 타인을 걱정하는 마음은 사실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내가 한 걸음 물러선다고 해서, 그 사람을 걱정하지 않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의 무조건적인 희생과 배려가 그 사람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유일한 표현 또한 아니다. 하지만 그 적당한 '선'을 찾는 것은 매우 애매하고 어렵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적당함의 기준이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스트레스의 허용치가 다른 것처럼.
그렇다면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
M씨의 경우처럼, 만약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 대해 상시 걱정을 하고 있고, 언제 울릴지 모르는 카카오톡 메시지에 매 순간 긴장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쉴 수 있는 시간이 없다면 우선 ‘예외’의 시간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이 스케줄에 정해 놓은 시간 동안은 시간 동안에는 그 긴장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것을 권장한다. 예를 들어 수업/근무시간이나 잠을 자야 하는 새벽에는 걱정하는 마음의 스위치를 잠시 꺼두는 것이다. (만약 이런 생각이 불안감을 일으킨다면, 이 외의 시간에는 마음껏 걱정을 해도 괜찮다는 것을 기억하자) 만약 이 정해진 시간에 자신이 염려하는 사람이 도움이 필요할 경우에는 (1) 기다리거나 (2)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습관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연습하게 자연스레 나 자신과 그 사람이 염려하는 마음을 나눌 수 있게된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처럼, 자신이 가진 지나친 염려를 다른 사람과 나누게 되면 그 부담감은 절반이 된다. 반대로 내가 모든 걱정을 다 안고 지낸다면, 타인에 대한 지나친 염려는 나는 ‘대신 걱정해주기’라고 설명한다. 타인은 그만큼 자신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줄어들게 된다.
물론 이러한 습관을 갑자기 만든다는 것은 어렵다. 때문에 반드시 실현가능한 목표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급적이면 1시간에서 2시간 정도로 정해 놓고 시도해보는 것을 권장한다.
“하지만 죄책감인 드는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Feeling comfortable with discomfort’라는 말이 있다. ‘불편함에 익숙해진다’는 뜻이다. 만약 지나친 죄책감에 시달리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리고 자신을 혹사시키면서까지 죄책감을 해소하려 한다면, 나는 오히려 약간의 죄책감에 익숙해지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사실 죄책감을 완벽하게 해소하면서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를 지키기 위해서 약간의 죄책감을 포용하는 연습도 필요하지 않을까?
내가 나를 위해 친절을 하나 베풀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