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외신을 좋아한다. 손흥민을 주제로 쓴 외신을 인용하면 늘 좋은 평가(높은 클릭수)를 받는다. 손흥민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우리라는 걸 알면서도 외신 기자의 평가가 그 가치를 더 인정받는다. 손흥민을 현장에서 목격한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영국, 독일, 스페인, 프랑스 등 축구 강국에 있는 기자들이 쓴 기사는 늘 좋은 ‘취잿거리’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분데스리가 현장을 다니며 독일에서 뛰는 우리 선수들을 바라보는 현지 취재진의 생각이 궁금했다. 자주 그들에게 묻고 그들의 평가를 빌려 기사를 썼다. 내가 보지 못한 부분들을 발견해내는 그들만이 가진 역량과 시야에 놀라기도 했다. 잦은 소통 덕분에 자연스레 현지 취재진과 좋은 관계를 쌓았다. 나 역시 그들의 기사에 등장하는 취재원이 되기도 했다. 그들에겐 ‘한국에서 온 기자’가 유용한 취잿거리였을 테니까.
교류가 잦아지며 재밌는 상황을 겪었다. 독일의 축구 전문 이적 웹사이트 <트랜스퍼마르크트>의 한 에디터와 친해졌는데, 마침 아시아를 담당하는 사람이었다. MLS 전문가이기도 했다. 밴쿠버 화이트캡스에서 뛰었던 황인범도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지난해 여름 황인범이 독일행을 추진하며 밴쿠버가 대체자로 한국의 윙어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소식이 나왔다. <트랜스퍼마르크트>의 에디터는 내게 혹시 그 윙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다. 선배 기자들의 도움을 받아 제주유나이티드 안현범이라는 정보를 알아내 공유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말해주기 무섭게 그 에디터는 <트랜스퍼마르크트>에 빠르게 정보를 업데이트했다. 그리고 곧 해당 정보를 인용한 기사가 국내 언론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조금만 발품을 팔아 취재하면 충분히 <트랜스퍼마르크트> 인용 없이 쓸 수 있는 소재였구나. 구글에 우리나라 선수 이름을 무한 검색하며 외신이 써주길 기다릴 필요가 없구나.
이런 경우도 있다. 지난해 여름 정우영의 에이전트가 한 한국 선수를 데리고 킬에 가서 테스트를 봤다는 정보를 얻었다. 테스트 정도는 에이전트의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진행될 수 있는 일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킬이 이재성과 서영재를 경험하며 한국 선수에 호의적이겠구나, 하고 혼자 생각하고 말았다.
킬 지역지 <킬러 나흐리히텐>과 정보 공유가 자주 이뤄졌는데 당시 내게 꽤 구체적인 정보를 줬다. 이재성의 집 계약이 곧 끝난다는 정보였다. 이재성이 본격적으로 이적을 준비 중이라는 신호라고 생각해 취재 끝에 그가 어디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는 지 기사를 써냈다. 그 기자가 내게 정보를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거다. 고마운 마음에 내가 가진 저 얄팍한 정보라도 공유했다. 정우영의 에이전트가 한 한국인 선수를 데리고 킬에서 테스트를 봤다고.
그에게 ‘정우영’이라는 키워드가 꽂힌 모양이다. 해당 지역지에서 마치 킬에서 정우영 임대에 관심이 있고, 정우영 역시 킬 이적을 고려 중이라는 뉘앙스의 기사를 냈다. 오보에 가깝다. 내가 급히 연락하자 받은 답변은 "어쩔 수 없었다"였다. 평소 국내에서도 이재성 때문에 자주 인용되던 매체였는데, 그때 신뢰감이 많이 떨어졌다. 부디 저 기사는 국내에서 인용하지 않길 바랐다.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국내 매체에서 그걸 인용하고 말았다. 아쉬움이 들었다. 국내에서 조금만 취재하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정보였을 텐데. 외신 맹신이 낳은 결과였다. 물론 일차 잘못은 팩트를 부풀리다 못해 오보로 낸 지역지에 있다.
최근에는 백승호의 사례에서 발견했다. 백승호는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있다.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바르셀로나로 떠날 때 수원삼성의 은혜를 입은 그는 그 은혜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다. K리그 복귀를 추진하며 수원과 얽힌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현재는 낙동강 오리알 처지에 놓여있다.
그런 백승호에게 ‘배신자’ 타이틀이 붙었다. 국내 언론에서 ‘배신자 백승호’라는 단어가 무섭게 쏟아졌다. 독일에서도 백승호는 ‘배신자’로 통한다고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알고 보니 독일 축구 전문 매거진 <키커>에서 백승호를 ‘Verräter(배신자)’로 표현했다. 방금 막 독일에서 뛰다 돌아왔으니 <키커>의 그러한 표현은 ‘신뢰’를 얻기에 충분했다.
다름슈타트 지역지 동료와 연락을 주고받다 안 사실이다. 그는 내게 최근 백승호의 국내 상황이 어떤지 묻다가 “키커에서 그렇게 썼지만, 실제로 독일에서 백승호는 ‘배신자’로 여겨지지 않아”라고 말했다. 나는 “한국에선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어”라고 대답했다. 그는 “진짜 한국에서 배신자라고 했어? 그거 <키커>의 @@@가 쓴 건데, 한국 기사 인용한 거라는데?”
<키커>에서 백승호의 행보를 꾸준히 좇는 동료가 있다. 그가 쓴 기사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국 매체에서 수원월드컵경기장에 걸린 ‘은혜를 아는 개가 배은방덕한 승호 보다 낫다’라는 걸개를 기사로 다뤘는데 궁금해서 번역했더니 ‘배신자’ 라는 키워드가 눈에 띄었다고. Verräter는 제목으로 뽑기에 매력적인 키워드였다. 국내 언론의 수많은 인용으로 <키커>의 키워드 활용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백승호는 ‘독일에서도 배신자로 통하는 선수’가 됐다. 정작 <키커>는 당황스러운 눈치다. 우리도 한국 매체를 인용했을 뿐이라며.
영국 언론, 독일 언론, 스페인 언론 타이틀이 붙으면 조회수가 훌쩍 뛰는 환경이다. 같은 소재를 다뤄도, 같은 말을 해도 국내보다 외신(특히 서양권)의 기사가 더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여기에 자극적인 키워드가 더해지면 더없이 좋은 소스다. 매체의 경중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국내 언론과 외신의 이런 티키타카가 ‘활발하게’ 이뤄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진=정재은, <킬러 나흐리히텐>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