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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은 Feb 18. 2021

이청용을 응원하며 '안녕'을 배운 그들

함부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기차 출발 까지 남은 시간 13분. 낯선 공항에서 10분 내로 기차 플랫폼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난 바짝 긴장했다. 헐레벌떡 뛴 덕분에 킬로 가는 기차에 간신히 몸을 실었다. 좌석에 푸우욱 몸을 맡기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킬에 도착하려면 30분은 걸린다. 저녁에 할 일이 많다. 2018년 9월 22일, 이재성의 홀슈타인 킬과 이청용의 보훔이 만나는 날이다. 정신없이 바쁠 테니 눈이나 좀 붙여야지.


음악을 들으며 스르륵 잠에 드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렇지만... 이곳은 독일이다. 축구에 미친 듯이 열광하는 나라. 내가 가는 경기장은 홀슈타인 슈타디온이다. 곧 내 옆, 뒤, 맞은편 자리를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축구팬들이 꽉 채웠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뚜껑이 열린 맥주병들이, 테이블 아래는 새 맥주짝이 놓여있다. 기차 출발과 동시에 그들은 정체모를 응원가를 웅장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잠자긴 글렀다. 일이나 해야지.


캐주얼하게 머플러를 두르고 맥주를 마시며 노래하는 팬들 가운데 나는 우두커니 앉아서 노트북을 두드렸다. 흘끔흘끔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 눈에는 내가 꽤 신기해 보였을 거다. 내 옆에 앉은 한 팬이 용기를 낸 모양이다. “너도 한 잔 할래?”라고 맥주 한 병을 내밀었다. 나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니고, 무엇보다 일하러 가는 중이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했다. 그는 “넌 어디 가는 길이야?”라고 물었다. “나도 홀슈타인 슈타디온에 가고 있어.”


웬 동양인 여자애가 어딘가 지루하게 생긴 갈색 가방을 끼고 노트북을 두드리며 축구장에 가고 있다고? 순식간에 그와 같은 무리로 보이는 이들이 내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 이런 집중은 조금 부담스러운데.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진짜? 너도 축구 보러 가는 거야?”, “혼자?”, “너도 보훔 팬이야?” 등등의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독일어를 배운 지 6개월밖에 안 된 상태라 그들의 질문을 내 머릿속에 빠르게 입력해 대답할 능력이 없었다. 그때 내 귀에 강렬하게 꽂힌 질문이 있다.


너는 어느 나라에서 왔어?

해외, 특히 서양권에서 지내본 사람이라면 저 질문이 반가운 나를 이해할 것이다. 반가움을 넘어 감동적이다. 보통 “너는 중국에서 왔어?”라고 묻거나, 대놓고 중국어로 “니하오”라 인사하는 이들이, 안타깝게도, 대부분이다. 인종차별적인 뜻으로 던지는 이들도 있고 그냥 정말 몰라서 묻는 이들도 있다. 내 입장에선 어느 쪽도 반갑지 않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난 “나 한국에서 왔어!”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부터 보훔 팬들의 ‘우리 이청용’ 자랑이 시작됐다. 조용히 앉아서 가고 싶던 나의 꿈은 산산조각 난지 오래.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이청용이 이적한 지 2주도 안 됐는데 팬들은 이미 그에게 푹 빠져있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왔고, 한국 국가대표 출신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의 별명인 ‘블루 드래곤’을 독일어 ‘Blauer Drache(블라우어 드라하)’로 바꾸기까지 했다. 신나게 이청용의 프로필을 읊는 그들은 오늘 학교에서 배운 것을 자랑하는 어린 소년들 같았다. 홀슈타인에 이재성 -정확히는 ‘예성’이라고 했다. 독일식 발음이다- 이라는 대단한 선수가 있지만 이제 우리에겐 ‘Blauer Drache’가 있다며 두렵지 않다고 큰 소리를 쳤다.


그러더니 함부르크에 임대를 떠났던 황희찬 이름이 나오고, 구자철과 손흥민에 이어 차두리까지 등장했다. 정점은 차범근이었다. 그가 과거 분데스리가에서 얼마나 대단했는지 목청을 높였다. 분명히 내 또래 같았는데 말이다. 독일에서 족적을 남긴 한국 축구 선수들의 역사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바이에른에도 어린애 한 명 있지 않아?”라며 정우영까지 잊지 않고 챙겨주는 센스.




킬 중앙역에 도착했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경기장에 갈 거라며 내게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 정말 고마웠지만 벌써 기차에서 맥주를 최소 두 병 정도 마신 듯한 그들과 택시를 함께 타고 가는 건 조금 불편할 것 같아 사양했다. 그들은 쿨하게 오케이 했다. 그러더니 내게 물었다. “한국어로 Hallo랑 Tschüss는 뭐야?” 나는 천천히 또박또박 설명해줬다. “Hallo는 '안녕', Tschüss는 '잘 가'야.” 덩치 큰 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아녕~아녕~ 잘카~ 라고 활기차게 인사했다. 30분 전만 해도 잠들기 직전이었던 나도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이청용을 응원하러 가는 길에 '안녕'을 배웠다. 유럽에 나와 질리도록 들었던 ‘니하오’나 ‘곤니찌와’ 대신 ‘안녕’을 주고받으며 인사할 수 있던 소중한 시간. 혼자 경기장을 오가는 길은 어쩐지 무서울 것 같았는데 '안녕' 덕분에 긴장은 사르르 녹았다. 그 뒤로도 종종 나는 한국 선수들을 취재하러 가는 길에 이런 소소한 재미를 누릴 수 있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한 순간. 축구가 가진 또 다른 작은 힘. 이 글을 쓰면서도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덕분에 난생처음 떠났던 멀고 낯선 킬 여정이 외롭지 않았다. 이청용과 이재성에게 뒤늦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사진=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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