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먹는 걸 좋아한다. 소문난 맛집이라면 반드시 가서 맛을 보고야 만다. 독일 뮌헨에 산 이후로는 그런 맛집 탐방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한국처럼 먹을거리가 다양하지도 않고, 외식 문화가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인건비가 비싼 독일에서 남이 해준 음식값은 금값이다. 그도 그렇지만, 싱싱한 유기농 식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환경 덕분에 집에서 해 먹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다. 독일인들도 정말 특별한 날이 아니면 굳이 외식을 하진 않는다.
얼마 전, 다양한 문화권 속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내게 레바논 식당에 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녀의 레바논 지인이 적극 추천해준 곳이라면서 말이다. 오랜만에 내 안의 맛집 호기심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 호기심은 단지 독일이란 환경 때문에(?) 보이지 않았을 뿐, 언제나 내 몸 어딘가에 숨어있었다. 게다가 금요일 저녁이라니. 콜!
이런저런 중동 국가의 음식과 문화를 접해왔지만 레바논은 처음이었다. 레바논 축구대표팀과 우리 대표팀과 경기를 취재했던 기억이 내게 레바논의 전부다. 무엇보다 레바논 전통 음식이라 하면 떠오르는 게 전혀 없었다. 워낙 다양한 문화가 녹아있기에 음식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우리가 간 식당의 이름은 Ksara(크사라)다. 크사라는 레바논의 한 지방 이름으로,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와이너리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음식도 음식이지만, 와인이 유명한 식당이다. 아쉽게도 야외 테이블이 꽉 차서 우리는 실내에 앉았다. 날씨가 좋으면 독일인들은 무.조.건. 밖에 앉기에(맛은 중요하지 않다. 밖에 앉을 곳을 찾아다니는 그들) 우리는 얼떨결에 실내에서 굉장히 프라이빗한 시간을 보내게 됐다.
레바논 식당을 온 건 그녀나, 나나 처음이기에 어떤 메뉴를 주문해야 할지 몰랐다. 레바논 지인이 추천해준 메뉴와 이런저런 전채요리를 주문해보기로 했다. 곧 그녀의 친구도 오기에 3인이 배불리 먹을 만큼의 메뉴를 골랐다. 전채로는 Mtabal(므타발)이 필수란다. 숯불에 구운 가지의 속을 파내 참깨 페이스트와 레몬즙으로 버무렸는데, 후무스와 비슷한 비주얼이다. 시금치와 로스팅한 잣, 양파, 레몬즙으로 속을 채운 시금치 만두 Fatajer(파타예르)도 주문하고 메인으로는 양고기와 닭가슴살 요리인 Mischwi mschakkal(미쉬 므샤칼), 화산암으로 구운 귀족 도미 요리를 골랐다. 메뉴를 주문하며 주인아저씨에게 "3명이서 먹기에 너무 많을까요?"라고 했더니, "나는 이 메인 메뉴를 혼자 다 먹어"라고 하셨다. 전채와 메인은 동시에 서빙해달라고 했다.
와인도 빼놓을 수 없지. 병으로 된 와인과 오픈와인이 있는데, 오픈와인 옆에 모두 '레바논식~'이라 적혀있어 이 중에 주문하기로 했다. 주인아저씨에게 와인을 추천해달라 했더니 "우리 와인 다 맛있어. 우리 지방에서 직접 공수해온 거야"라고 엄청난 자부심을 보였다. 알고 보니 그는 크사라 지방 출신. 그가 보인 자부심이 어딘가 멋져 보였다. 우린 시원하고 달달한 로제를 주문했다.
곧 와인이 먼저 나왔다. 작은 와인잔에 따라주시는데, 그 향이 어찌나 진한지 입을 잔에 대기도 전에 코끝을 찔렀다. 친구와 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헐"이라고 육성으로 감탄했다. 와인을 잘 모르는 나도 그 강한 향이 느껴질 정도였다. 레바논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에서 온 와인이라는 타이틀까지 있어 더 특별했을지도.
음식이 나오기까지는 약 15~20분 정도가 걸렸다. 언젠가부터 빨리 나오는 음식보단 천천히 나오는 음식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왠지 요리에 더 정성을 들이는 듯한 느낌적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또,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천천히 음료를 마시며 기다리는 시간도 꽤 가치 있다. '빨리빨리' 문화에서 벗어나 산 지 4년 차가 되니 이런 여유로움이 생겼다.
곧 전채 요리와 메인 요리가 상을 꽉 채웠다. 하나 놀랐던 점은, 코 안으로 훅 들어오는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전혀 없었다. 향신료 때문에 중동 음식을 꺼려하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앉아서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배고픈 우리는 사진을 빠르게 찍고 따뜻한 피타(Pita) 빵부터 먹었다. 므타발 위에는 신선한 올리브유가 뿌려져 나오는데, 잘 섞어서 피타 빵에 올려 먹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한국인의 입맛에 익숙한 조합으로 어우러졌는데 생각지도 못한 맛이 나서 신기했다.
독일에서 도미를 먹는 건 처음이다. 특별한 간은 되어 있지 않았다. 레몬즙만 가볍게 뿌려 먹었는데, 곁들여진 샐러드와 정체 모를 소스와 함께 나온 밥이 입맛을 돋웠다. 생선살이 실하고 부드러웠다. 양고기는 종류가 두 가지다. 하나는 다져서 뭉친 양고기, 다른 하나는 흔히 접할 수 있는 양갈비. 둘 다 다른 양념으로 구워져 나왔다. 닭가슴살도 부드럽고 맛있다. 그릇에 함께 뿌려져 나온 칠리 프레이크에 찍어 먹었더니 톡 쏘는 맛이 났다. 친구는 저 밥이 맛있다며 감탄했다. 다음에는 소스의 정체를 알아와야 할 것 같다.
내 입맛을 가장 사로잡은 건 바로 이 시금치 만두, 파타예르. 정갈함보다 투박함에 가까운 만두 모양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한 입 베어 물고 깜짝 놀랐다. 만두피도 알고 보니 식당에서 직접 만들었는데, 페이스츄리 식감이 났다. 바스러지지 않고 쫀쫀한 게 특징. 따뜻하고 녹진한 시금치속이 혀를 즐겁게 한다. 이 메뉴는 한 번 더 주문해서 먹을 정도였다. 아마도 이걸 먹으러 조만간 다시 갈 듯싶다.
나중에 주문한 이 감자 전채요리도 환상적이었다. 주인장 아저씨의 추천이 있었다. 마늘과 신선한 레몬즙, 고수와 칠리로 양념을 해 구운 감자. 엷게 저민 감자에 양념이 충분히 베어서 식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살짝 크리스피해서 우리 입맛에 너무 잘 맞았다. 친구에겐 이 감자 전채요리가 원픽으로 뽑혔다.
와인을 홀짝홀짝 즐기며 여러 가지 다양한 음식을 맛보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약 2시간 동안 음식을 즐긴 후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꽉꽉 찬 내부. 주인아저씨와 서빙 직원들과 기분 좋게 인사하며 식당을 나왔다. 나중에는 더 많은 전채요리를 먹어보기로 했다. 뜻밖에 뮌헨에서 먹은 레바논 음식. 모르긴 몰라도 음식 문화가 굉장히 발달한 곳이란 걸 몸소 체험했다. 내가 먹어본 중동 음식 중 단연 최고였다. 요리마다 다른 그릇도 보는 재미가 있었고. 외식 선택지 폭이 좁은 뮌헨에서 괜찮은 식당을 발견해 기쁘다.
사진=정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