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신기한 일이네'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색다른 모험에 도전하기보단 안정적인 내 생활 반경 안에 머무는 게 더 좋기 때문이다. 안정기에 접어들 시기는 아직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전히 격동기를 겪고 있진 않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공부 등은 언제나 환영하지만 예전처럼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진 않는다.
그냥, 파스텔톤의 내 삶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쯤 쨍한 원색으로 점을 콕 찍는 정도.
물론 나는 내 또래의 다른 많은 사람보다 예외적인 환경에 놓여있다. 독일 뮌헨에 살고 있다. 20대 중후반에 건너와 30대로 접어드는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생활권이 유럽이면 그 자체가 모험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막상 여기서 살면 그렇지도 않다. 1, 2년이면 나만의 생활패턴이 생기고 또 뮌헨은 그리 큰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금세 적응한다. 대세가 바뀌고, 시스템이 발전하는 속도가 한국보다 훨씬 느려 오히려 더욱 안정적인 느낌. 그냥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란 서양인들이 주변에 조금 더 많이 돌아다니는 곳에 살고 있을 뿐,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
그런 내게 가끔 '읭?'싶은 일이 벌어진다.
독일인이 내게 길을 물을 때다. 나는 누가 봐도 머나먼 아시아 국가에서 온 사람인데 그런 내게 어린 꼬마부터 내 또래의 젊은이들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길을 묻는다. 기억나는 순간을 복기해본다.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Sendlinger Tor(젠들링어 토어)역에서 Studentenstadt(슈튜덴텐슈타트)역까지 조깅을 하고 있었다. 내 앞에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걷고 있는데, 뒤에서 봐도 그들이 밤새 술을 마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살짝 옆으로 비켜서 가려고 하자 그중 한 명이 내게 "Entschuldigung!(저기)"라며 말을 걸었다. 내가 멈춰 서자 "혹시 Münchner Freiheit(뮌히너 프라이하이트)가 이 방향이 맞아?"라고 물었다. 당시는 내가 독일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여서 아직 독일어가 익숙지 않았다. 다행히 맞다, 아니다 정도는 할 줄 알아서 맞다고 했더니 고맙단다. 그때가 아마 독일인이 내게 길을 물어본 게 처음이었다. 참, 별 일이 다 있다.
U-Bahn(우반; 독일의 지하철)을 타고 이동 중이었다. 멀뚱멀뚱 서있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우반 지도를 내게 보여주시며 한 정거장을 가리켰다. 이곳으로 가려는데 잘 탄 게 맞냐며 물으셨다. 맞다고 해드리자, 그제야 안심이 되시는 듯 좌석을 찾아 앉으셨다. 뭔가, 할아버지가 저 먼 곳까지 편히 앉아서 가실 수 있게 내가 도운 기분이 들어 어딘가 뿌듯했다. 그런가 하면 우반에 타기 직전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꼬마 세 명이 우르르 와서 방향을 묻기도 하고, Moosach(무자흐) 방향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이 어딘지 헷갈린다며 도움을 요청한 할머니도 계셨다.
그리고 오늘. 백신 2차 접종을 하러 Hauptbahnhof(하웁반홉)에 가던 길이었다. 젠들링어 토어역에서 U2라인으로 갈아타려 기다리는데 정장 차림의 한 여자가 조금 급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귀에 깊숙이 박아둔 이어폰을 빼며 "Messestadt(메세슈타트)로 가려면 이 방향이 맞아?"라고 물었다. 나도 약간 잠이 덜 깬 상태라서 정신이 없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아니, 반대 방향이야"라고 대답했다. 여자는 고맙다며 높은 힐을 신고 빠르게 달려갔다.
신기한 일이네.
타지에서 살다 보면 주로 내가 도움을 구하는 포지션인데 가끔 그게 뒤집힐 때면 참 신기하고, 별 일이 다 있다 싶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여기서 정말 내가 편안하게, 잘 녹아들어 살고 있구나. 여기서 5년을 살든, 10년을 살든 이방인에 불과하지만 최소한 이질적이어 보이진 않구나. 덧붙여, 이 사람들 참 편견 없구나. 나라면 한국에서 노란머리 서양인에게 선뜻 길을 물어볼 수 있을까. 이건 국가가 얼마나 글로벌한 환경에 놓여있느냐의 이슈도 포함되어 있지만 어쨌든 나라면, 어플의 도움을 받았을 것 같다.
그렇게 난 잔잔했던 내 파스텔톤 일상에 또렷한 원색의 점을 콕 찍었다. 독일에서 독일인이 내게 길을 묻는, 별 일을 다 겪은 날.
사진=정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