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재은 Jul 26. 2021

독일 스타벅스 직원이 내 이름을 물을 때


4년 전 독일로 올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 "독일에서 쓰는 이름은 뭘로 할 거야?"


그에 대한 내 대답은, "그냥 내 한국 이름으로 살 거야."


해외로 나올 때 영어 이름을 하나씩 지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나는 그냥 내 이름으로 살기로 했다. 독일에서 어차피 내가 희생해야 하고, 버려야 할 게 많은데 내 아이덴티티까지 양보하고 싶진 않았다. 발음이 조금 어렵겠지만 너희가 알아서 잘 발음해주렴.


내 이름은 '재은'이다. 다행히 받침이 한쪽에만 들어가서 발음이 크게 어렵진 않지만 '은' 발음은 난이도가 꽤 높은 편이다. 독일 친구들에게 내 이름을 알려줄 땐 늘 '제인(Jane)'을 알려주고, 거기서 인을 조금 게으르게 발음하면 '재은'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럼 대개 잘 이해한다. 


친구나 지인이야 시간을 두고 알려줄 수 있지만 예외가 딱 하나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내 이름을 듣고 써야 하는 곳, 스타벅스에선 얘기가 다르지. 매장 안이 여유로우면 이름을 물어보지 않는데, 사람으로 바글바글할 때는 이름을 꼭 물어봐서 컵에 쓴다. 음료끼리 섞이지 않기 위해서다. 음료가 완성되면 직원이 컵에 쓰여있는 이름을 크게 부르고, 호명된 사람이 픽업하는 식. 한국처럼 번호가 있거나 고정 닉네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쨌든 스타벅스에서 내 이름을 물어볼 때마다 엄청난 내적 갈등에 빠진다. 내 세례명인 율리아를 말할까? 아님 내 성을 말할까? 그냥 이름을 말해볼까? 독일에서 율리아는 Julia인데, 내 세례명은 Youllia다. 러시아식 스펠링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틀린 이름이 될 것 같아 세례명은 사용하지 않기로.


용기를 내서 재은을 말하면 십중팔구 되묻는다. 다시 한번 말해줄래? 스펠링까지 읊으며 알려줘도 제대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4년 동안 딱 한 번 있었다. 주로 Jen, Gen, Zen, Jaen으로 적힌다. 다른 건 백번 양보해 그렇다 쳐도 Gen은 너무한 것 아니냐며. 지읒을 표현한 다양한 알파벳을 보면서 내가 아시안이란 점을 고려해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 보여 왠지 귀엽기도 하다. 


진짜 웃긴 순간은 내 성을 말했을 때다. 나는 정(Jung)씨인데, 독일식 발음으로 '융'이다. 독일에도 있는 성씨라서 직원들이 알아듣기도 쉽다. 심지어 '어리다'라는 뜻이 있는 단어다. 직원들이 너무 바빠 보일 땐 쓰기 쉽도록 내 성을 말하는데 그럼 "Ich bin Jung(나는 융이야)"가 된다. 독일인들 귀에는 "나는 어려"로 들린다. 가끔 내 대답을 듣고 "와우, 나는 늙었는데"라며 개그(?)를 치는 직원도 있다. 혹은 "좋겠다. 평생 어리겠네!"라고 하거나. 처음에는 이 독일식 개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웃다가, 이제는 "응, 너무 좋아!"라고 맞받아치는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받은 내 아메리카노에 적혀있는 글자, Yung. 


젠장. 너희 편하라고 융이라 말했더니 또 (쓸데없는) 배려심을 보여주다니. (물론 "진짜 그 '융' 맞아?"라고 되묻고 제대로 써주는 경우도 많다.)


아시안 이름이 익숙지 않은 나라에서 내 이름을 갖고 살겠다고 다짐했으니 뭐, 감수하는 부분이다. 이번엔 내 이름을 어떻게 쓸지 궁금하고, 은근히 재밌기도 하다. 


내일 오후에는 스타벅스에서 작업을 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알쓰'가 독일에서 살아남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