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에 약하다.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온 몸이 불덩이가 된다. 알코올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칵테일이나 맥주 500ml을 2시간에 걸쳐 마신다. 누군가 내게 "술 한 잔 사줄게!"라고 한다면 속으로 생각한다. 넌 그날 돈 좀 아끼겠구나.
그런 내가 맥주의 나라 독일에 살고 있다. 심지어 지구 상 최대의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가 열리는 뮌헨에서! 놀랍게도 벌써 4년 차다. 한국보다 술을 접하기 '좋은' 환경이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어디서든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지내니 말이다. 지금은 코로나19로 불가능하지만, 마스크를 쓰지 않던 과거에는 대중교통 안에서도 맥주병을 부딪히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축구 경기라도 열리는 날이면 이미 거나하게 취한 무리가 줄줄이 U-Bahn(독일의 지하철)에 타서 또 맥주를 들이켠다.
당연히 궁금했다. 도대체 맥주가 얼마나 맛있길래? 가장 대중적인 맥주는 Augustiner Helles(아우구스티너 헬레스)다. 이 병 맥주를 마시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다. 금요일 밤에는 몇 짝씩 들고 다닌다. 뮌헨의 강 Isar(이자) 근처에 가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맥주다. 찬 강물에 담가 뒀다 마시고, 비어퐁 게임도 하고, 그냥 태닝을 즐기며 마시기도 한다.
나도 당연히 마셔봤다. 믿기지 않겠지만 첫맛은 달콤하다. '맥알못'인 내게도 맥주의 풍미가 느껴질 정도로 진하고 강하다. 딱 거기까지다. 오, 마실만 한데? 하고 덤비지만 반도 다 못 해치운다. 친구들이 3, 4병씩 들이킬 때 한 병도 제대로 못 비우니 문제가 심각하다.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맥주가 있다. 바로 Radler(라들러)다. 헬레스 맥주와 레모네이드가 정확히 5:5 비율로 섞였다. 달달한 레몬맛 덕분에 맛있게 마실 수 있다. 알코올 함량도 물론 높지 않다. 맥주 브랜드에 따라 다른데 대개 2,0%와 2,8% 사이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이걸 맥주라 부르지 않는다. 위키피디아에도 '맥주가 섞인 음료'로 소개되어 있다. 난 꿋꿋하게 외친다. 신이 내린 맥주라고. 참고로 바이에른주에는 Weizenbier(바이첸비어)와 레모네이드가 섞인 Russe(루세)가 있는데, 이 역시 라들러 범위에 포함된다. 개인적으로 내 입맛엔 별로. 좀 쓰다.
내가 제일 빠르게 잘 마시는 건 2,0% 함량의 Gösser(괴써)다. 오스트리아에서 왔는데, 독일인들도 최고의 라들러라고 인정할 정도로 맛있다. Hacker Pschorr(하커쇼어)의 Natur 라들러도 맛있다. 알코올 함량은 괴써보다 높다. 무려(!) 2,5%나 되기 때문에 괴써처럼 벌컥벌컥 마시진 못한다. 난 정말 알쓰다.
어쨌든 나는 이 라들러를 마시며 독일인들과 어울린다. 한여름, 공원이나 호숫가에 앉아 방금 막 키오스크에서 사 온 차가운 라들러를 한 병 마시면 천국이 따로 없다. 산 정상에서 마시는 라들러는 또 어떻고. 비어가르텐에서 방금 막 뽑아낸 라들러를 마시면 아마 누구든 사랑에 빠질 거다. 뮌헨의 유명한 비어가르텐 Chinesischer Turm에서 난생처음 라들러를 마셨을 때 받은 충격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거 뭐야?"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지. 그때가 2014년이니, 나는 벌써 8년째 라들러와 사랑에 빠진 셈이다.
갑자기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요즘 뮌헨 날씨가 정말 좋고, 강렬한 햇빛 아래서 차가운 라들러 한 병을 마시고 싶기 때문이다. '알쓰'인 내가 독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