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나와 여행 속의 나는 참 다른 사람이다. 일상 속에선 뭐든지 계획적이다. 스케줄러를 오전 7시부터 빼곡하게 적어 그대로 이행해야 속이 시원할 정도로 계획파다. 독일에 살면서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한국에선 계획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극도로 심했다. 주말에 낮잠 2시간 자려고 알람을 맞췄다가 못 듣고 3시간 잔 후 나 자신이 끔찍하게 싫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여전히 계획을 좋아한다.
여행에선 다르다. 대충 이날은 뭐하고, 이날은 뭐하자 식의 계획만 세워두고 맛집 찾기, 명소 찾기는 뒷전이다. 그때그때 발길 닿는 대로 가는 타입. 식당은 최대한 로컬스러워 보이는 곳으로. 다 놀고 집에 온 후에야 내가 갔던 곳들을 찾아보면서, 아, 여기가 거기였어? 한다. 그런 내게 어마무시한 즉흥 여행이 펼쳐지는데...
금요일 저녁, 외식을 하다 갑자기 이탈리아에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파트너의 제안에 나는 비웃었다. 지금 이미 저녁 8시가 넘었는데? 어느 세월에? 그리고 숙소는? 내가 여행에서 절대 포기 못하는 게 쾌적한 잠자리인데, 숙소가 남아있을까 걱정했다. 그런 내게 파트너는 "어디든 우리 누울 자리 없겠어? 가서 아침 바다 보면서 생각하자"라고 쿨하게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무책임한 발언인데 그땐 왠지 확신이 생겼다. 그래, 가자.
재빨리 코로나19 테스트를 받고, 10분 만에 짐을 챙겼다. 평소에 손이 잘 안 가던 원피스만 두 벌 챙기고 휘리릭 떠났다. 밤 11시 10분경에.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에 뮌헨 밖으로 벗어나는 짜릿함이란. 숙소는 차 안에서 잡았다. 내 생에 이런 즉흥 여행은 처음이다. 새삼 내가 유럽에 살고 있다는 게 실감 나기도 했다. 이탈리아가 이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곳이구나.
새벽 내내 어두컴컴한 아우토반을 달렸다. 오스트리아를 지나치고, 스위스를 거쳤다. 국경을 넘을 때마다 핸드폰은 로밍 안내, 코로나19 안내로 번쩍거렸다. 점점 날이 밝아졌다. 고속도로 위에 이탈리아 차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구나. 그리고 오전 6시 30분. 도착해버렸다. 이탈리아에.
밤새 차 안에서 졸다가, 깨다가를 반복해 비몽사몽한 상태로 만난 포르토피노. 리구리아주에 있는 작고 예쁜 항구 도시. 크고 작은 요트와 보트가 동동 떠있는 아침 공기가 가득한 바다를 보며 잘 왔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런 아침 바다라면 숙소의 질이 좀 떨어져도 좋겠다 싶었다. 마음껏 먹고, 마시고, 수영하며 휴가 같은 주말을 즐겼다. 지금 기억나는 하이라이트는 영어를 잘 못하는 이태리인과, 이태리어를 전혀 못하는 우리. 영어로 말을 걸고, 이태리어로 답을 듣고, 다시 영어로 받아치는 희귀한 광경이 펼쳐졌다. 파트너가 독일어로 받아쳐도 끄떡없이 이태리어로 답을 해내는 그들. 아마 오랫동안 잊지 못할 즉흥 여행이 되겠지.
꿈만 같던 시간을 보낸 후 집에 와서 다음엔 어디 가지? 하고 고민하던 나를 발견. 여기저기 지도를 살피다가 깨달았다. 지금 이걸 보고 있으면 즉흥 여행이 아니네. 그냥 언젠가 또 갑작스레 휘리릭 떠나는 순간만 기대하기로 했다. 그때는 새벽에 도착해 수평선 너머에서 해가 뜨는 모습이 보고 싶기도 하고, 아니면 어디 오스트리아 시골에서 해먹에 누워 낮잠 자고 싶기도 하고, 또 아니면 캠핑카 위에서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고 싶기도 하고. 이 정도 상상은 괜찮겠지?
사진=정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