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는 감정 표현에 솔직하다. 뛰면 행복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못 뛰면 표정이 좋지 않다. 오직 '공'을 위해 인생의 대부분을 투자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백승호는 표정 관리를 가장 못하는 선수 중 하나다. 경기에서 져도 자신이 뛰는 순간을 회상하는 그의 입가엔 미소가 사르르 번진다. '흠칫' 놀라며 표정을 숨기지만 이미 늦었다. 반면 전반전에 교체되거나, 출전하지 못하면 그는 시선 관리도 제대로 못 한다. 땅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말조차 쉽게 건네기 힘들 정도로 먹구름이 끼어있다. 어릴 때 워낙 뛸 기회가 적었으니 다름슈타트에서 비로소 '프로 다운' 선수가 된 백승호에게 '출전'이 가져다주는 의미는 그 정도로 크다.
지난달 30일, 레겐스부르크 경기장에 도착했다. 많은 이가 백승호의 선발을 예상했다. 직전 라운드 잔트하우젠전에서 결장했기 때문이다. 최근 ‘잉글랜드 주간(Englische Woche; 경기가 2, 3일에 한 번 꼴로 열리는 주간)’이 2주 내내 이어져 마르쿠스 안팡 감독이 로테이션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러니 이전 경기에서 체력을 아낀 백승호가 선발로 나올 거라고, 나 역시 예상했다.
백승호는 벤치에 앉았다. 의외였지만 후반전 이른 시간에 투입될 거로 생각했다. 무엇보다 다름슈타트가 아슬아슬하게 1-0으로 앞서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백승호의 스피드와 날카로운 침투력 등이 다름슈타트 공격에 힘을 실어줄 거로 믿었다. 그런데 웬걸? 백승호는 후반 40분이 되어서야 투입됐다. 추가 시간이 5분이나 주어진 ‘덕분에’ 10분 간 그라운드를 누빌 수 있었다. 백승호는 악에 받친 듯 뛰었다. 오른쪽 측면부터 중원, 수비까지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뭐랄까, 안쓰러웠다.
그래도 곧 포칼 16강이 있으니까 거기선 선발로 뛰겠지. 포칼 2라운드에서 골을 넣은 기억도 있으니까. 포칼은 3일 후 열리니 안팡 감독의 ‘로테이션 철학’에 따르면 백승호는 선발로 나서야 ‘정상’이다.
2월 2일, 홀슈타인 킬을 상대하는 다름슈타트의 선발 라인업이 공개됐다. 백승호의 이름은 없었다. 그는 다시 교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레겐스부르크전에서 교체 명단에 있던 공격진 4인 빅토르 팔손, 펠릭스 플라테, 토비아스 캠페, 베르코 에리치 모두 선발로 나섰는데 백승호만 또 벤치에 앉았다. 심지어 플라테는 홀슈타인전을 앞둔 훈련에서 근육 문제가 생겼는데도 선발 기회를 잡았다. 백승호는 포칼을 포함해 최근 다섯 경기서 동포지션 경쟁자 중 가장 적은 출전 시간을 쌓았다.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아니겠지. 전술적인 이유가 있겠지'라며 의심 정도로 놔뒀다. 무엇보다 지난해 7경기서 연속 선발 기회를 잡아 더욱 반신반의했다. 이번 홀슈타인 킬 교체 명단에 이름을 올린 걸 보고 그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백승호는 안팡 감독의 눈에서 벗어났다. 이유는 모르지만 안팡 감독의 플랜에서 백승호는 뒷전이다. 또 하나의 확신. 백승호는 지금 힘들다.
백승호는 바르셀로나와 지로나에서 경기 출전을 못해 고생했다. 재작년 자신을 강하게 원하는 디미트리오스 그라모지스 전 감독의 정성에 감동해 다름슈타트로 향했다. 단번에 주전으로 떠올랐다. 분데스리가의 푹푹 꺼지는 잔디에도 적응해야 하고, 스페인과 다른 식사 시간에도 적응해야 하고, 날씨나 언어 등등에 새롭게 익혀야 할 게 많았다. 그런 그가 단번에 다름슈타트의 핵심 미드필더로 떠오른 건 백승호의 간절함과 피나는 노력, 그리고 감독의 신뢰 덕분이었다. 결국 감독의 신뢰와 지지가 없다면 노력도 간절함도 물거품이다. 보여줄 기회가 없으니까. 당시 만난 차범근 전 감독은 "승호가 저렇게 첫 경기부터 뛰고 주전으로 자리를 자리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어린 후배의 능력을 높이 사기도 했다.
백승호가 행복해하던 순간이 생각난다.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스페인에서는 많이 못 뛰었고, 심지어 벤치도 못 앉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렇게 경기를 뛸 수 있다는 게 힘들어도 너무 행복해요"라며 그는 배시시 웃었다. 간혹 출전을 못하는 경우에도 백승호는 상심하지 않았다. 그라모지스 감독의 신임 덕분이다. "예를 들어 포칼에서 선발로 뛰지 않았는데 감독님이 저를 따로 부르시더라고요. 경기력이 안 좋아서 교체로 내보낸 게 절대 아니고, 주말에 중요한 경기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이해해달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저를 믿어주시는 게 느껴져요. 경기에 나가게 되면 더 신뢰받을 수 있게 좋은 경기력을 보여야 해요."
구단은 바르셀로나 출신이자 국가대표인 백승호가 가져온 새로운 분위기에 신나 했고, 동료들 역시 스페인에서 축구를 배운 백승호를 높이 샀다. 첫 시즌에 적응을 끝낸 백승호가 이제 기세 등등하게 날아다녀야 하는데, 올 시즌 새로이 부임한 안팡 감독의 눈 밖으로 벗어나고 말았다. 이제 좀 뛴다며 그토록 좋아하던 백승호는 '나'빼고 로테이션을 열심히 돌리는 안팡 감독의 플랜에 크게 상처를 입었을 거다.
안팡 감독에게 그런 백승호의 상황을 물었다. 다친 건지, 전술적인 이유인지, 아니면 백승호에게서 원하는 부분이 나오지 않는 건지 구체적인 답변을 요청했다. 그는 "나는 백승호가 올 시즌 충분히 뛰었다고 생각한다"라면서 "우리는 '잉글랜드 주간'을 보내고 있다. 더 많이 뛰는 선수가 있으면, 더 적게 뛰기 마련이다"라고 답했다. 선수들의 체력 부담을 나누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그러기에 백승호는, 너무 세 경기 연속 벤치였다. 근육에 문제가 있는 선수까지 선발로 내보내는데? 결정적으로 백승호에 관해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무신경함이 느껴졌다. 백승호가 어떤 부분을 발전시켜야 하는지도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아, 이 사람. 백승호한테 관심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1년에 고작 몇 번 그 감독을 경험하는 나도 몇 마디를 통해 느낄 정도인데 백승호는 어떨까.
선발로 출전하던 백승호는 공격 진영에서 어시스트를 세 차례나 올리며 제 실력을 증명했다. 당시 백승호의 어시스트를 받았던 동료 세르다르 두르순은 "괜히 바르셀로나 출신이 아니더라"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홀슈타인과의 포칼에서 뒤늦게 교체로 투입됐지만 독일 일간지 <빌트>에서 평점 2점을 받았다. 선발로 뛴 공격진과 중원 멤버보다 높은 점수다. 평소 알고 지내는 다름슈타트 담당 기자는 안팡 감독의 백승호 활용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언성을 높였다. 경쟁력을 입증하고 사방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백승호를, 유일하게 감독만 외면하고 있다.
결국 백승호가 '행복 축구'를 찾아 나서는 모양이다. 적절한 때라고 생각한다. 백승호가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감독이 있는 팀으로 갔으면 좋겠다. 뛰어서 너무 좋다며 웃던 그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이제 겨우 스물 셋. 도전을 망설이기엔 너무 젊은 나이다. 고된 시간은 스페인에서 충분히 보냈다. 백승호가 다시 행복하게 뛸 수 있는 곳을 만나길 바란다. 그곳이 독일이든, 한국이든.
마지막으로 이재성의 말을 전한다. 힌트가 되길 바라며.
경기를 통해 매주 꾸준히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나를 잘 아는 팀에 가서 도움이 되고 싶지 유명하다고 내게 맞지 않은 팀에 간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잠깐은 기쁘고 좋겠지만, 그 뒤는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사진=정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