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히 이사하고 싶지 않다
가족과 함께 이민하기 두달 전, 미리 싱가포르로 잠시 들어왔다. 해야 할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건 집이었다. 이제는 아이 학교와 생활환경까지 고려해야 하니, 예전처럼 온라인으로 대충 고르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저번처럼 호텔에서 한달 생활을 하고 또 다시 이사하는 것 또한 마냥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싱가포르가 작은 도시라고 하지만, 막상 어디에 살아야 할까 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우선 가장 먼저 두가지 조건으로 필터링을 했다. 회사에서 너무 멀지 않을 것, 그리고 첫째가 유치원을 다녀야 하니 외국인으로서 다니기 좋은 환경.
위에 그림처럼 회사 위치(노란색)를 기준으로 대략 대중교통으로 40분 이내로 boundary를 그렸다(빨간색). 참고로 금융 회사들은 대부분 Downtown 지역에 몰려 있다. 나의 첫번째 집 또한 저기에서 도보로 가까운 곳에 그냥 구했다. 회사를 도보로 출근할 수 있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지만 여기에서 내가 원하는 평수를 구하기엔 예산이 부족했고 더군다나 아이 키우기엔 너무 도심이었다. 마치 여의도 중심가에서 애를 키우는 기분이랄까. 결국 이번엔 조금 더 주거 중심적인 지역으로 눈을 돌렸고 후보 지역들이 하늘색으로 칠한 곳들이다.
이제는 예산과 조건을 맞출 차례였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집값은 떨어지지 않았다. 정부가 공개한 월세 추이를 보면, 코로나 때 폭등한 이후 여전히 고점 근처에서 유지 중이다.
참고로 싱가포르의 주거 형태는 크게 세 가지다.
HDB: 정부가 관리하는 공공주택
Condo: 수영장, 헬스장 등 시설이 있는 일반 콘도
Landed: 단독주택
나는 평수를 조금 줄이더라도 깔끔한 시설이 우선이었다. 게다가 아이들을 매일 밤 쉽게 잠재울 수 있는 마법의 수영장은 결코 포기할 수 없었기에 자연스레 콘도 위주로만 봤다. 그러다보니 내 예산에서는 자연스레 평수를 포기하든가, 아니면 같은 평수를 유지하되 거리를 늘리든가이다.
그렇게 몇가지 콘도를 정하고 직접 뷰잉하기 위해 왔다. 뷰잉을 잡는 방법은 간단하다. '프로퍼티그루(PropertyGuru)'에서 대다수가 구한다고 보면 된다. 한국사람들만을 위한 '한국촌'이라는 사이트도 있지만 보통 여기는 학생들이나 사회 초년생을 위한 룸쉐어 매물들이 활발하다.
참고로 한국과는 달리 부동산이 상가처럼 있어 그냥 그 동네 아무데나 가서 들어가면 주변 매물을 보여주는 그런 편리함 따위 없다. 각 집마다 담당 중개인이 따로 있어 한 층에 4개의 호수가 있다면 전부 다 다른 중개인이 맡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프로퍼티그루(PropertyGuru)를 통해 중개인들에게 하나하나 직접 연락했고, 결국 약 20개의 뷰잉 일정을 잡았다. 모든 예약은 왓츠앱으로 해야 했고, 각 집의 위치를 지도에 찍어 동선을 맞추는 일도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아마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 15년 동안, 이렇게 고된 집 구하기는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다닌 그 주는 유난히 더워서,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해도 중개인이 늦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다음 일정을 맞추려고 땀 범벅이 된 채 택시를 잡아타고 달리던 기억밖에 없다.
중간중간 '그냥 이런 일을 대신해 주는 에이전시를 썼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성격상 직접 보고 결정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찝찝 했을 것이기에 어쩔수 없었다.
역시나 집을 뷰잉하러 직접 다녀보면 온라인으로 볼 때와는 전혀 다르다. 특히나 비대면으로 알 수 없어 현장에서 꼭 체크해야 하는 내가 생각하는 몇가지 포인트들이 있다.
1. 주변 공사 여부
싱가포르는 아직도 곳곳에서 공사가 한창이다. 특히 초반 단계의 공사는 드릴 소리가 상상을 초월한다. 1년 내내 진동과 먼지를 견디며 살아야 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1순위로 꼽았던 Great World 주변 콘도들은 전부 제외했다.
2. 채광 방향
동향과 서향, 북향에 따라 월세 차이가 꽤 난다. 내가 사는 콘도의 경우엔 100만 원까지 나기도 한다. 싱가포르처럼 일 년 내내 햇볕이 강한 나라에서는 햇빛 방향이 곧 생활의 질이다. 본인이 더위에 둔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서향은 꼭 피해야 한다.
3. 편의시설 접근성
지도로 보면 가까워 보여도, 실제로 걸으면 멀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 10분 거리도 체감상 30분이다.
그래서 꼭 직접 걸어봐야 한다. 다행인 것은 대체적으로 구글맵에서 예상하는 도보 시간보다는 적게 걸리는 느낌이다.
스무개 넘게 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처음 본 집으로 결정했다. 회사로부터 거리가 좀 있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의 조건을 다 만족했다. 다행인 것은 3년 전과는 다르게 임대인이 제시한 월세 가격에서 협상이 어느 정도 다 가능했다. 몇년전엔 임차인들 스펙까지 볼 정도로 까다로웠는데 그에 비하면 보다 수월하게 구한 것 같다.
그렇게 약간의 협상 끝에 계약을 했다. 한국과는 다르게 입주일에 보증금을 내는 시스템이 아니라 계약 즉시 두 달치 월세를 보증금으로 낸다. 이체를 마치고 나니, 또 다시 엄청난 물가를 실감했다. 8년이 넘은 흔한 콘도 중 하나임에도 요즘 우리나라에서 핫한 원베일리 수준의 월세와 비슷하니 말이다.